지난 2년 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해외 여행을 가기가 정말 어려웠죠. 그래서 제주도 여행으로 아쉬움을 달래는 분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랍니다.
이렇게 여행할 때 밤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면, 하늘에서 서울 야경을 꽤나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한강도 보이고, 불켜진 다리와 강을 둘러싼 건물들이 조그마한 사이즈로 한 눈에 들어오지요.
이 풍경이 보이면 꼭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하늘에서 보면 서울도 한 줌인데 뭘 그렇게 아둥바둥 살고 있나.”
오늘 만나볼 작가의 작품이 바로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사진 작품’ 타이틀을 가진 독일 출신 사진작가, 안드레아스 거스키 입니다.
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기술이 만들어 준 낯설게 보기의 마법
안드레아스 거스키
1. 전문 상업 사진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사진 기술을 접했던 거스키는 조그만 사이즈의 사진이 주류이던 시절 대형 사진을 시도한 작가 중 한 명이다.
2. 사이즈 뿐 아니라 증권 거래소, 대형 마트, 평양 매스게임 등 시의 적절한 장소와 소재를 포착하고, 평소에는 잘 볼 수 없는 시점을 선택해 새롭게 보는 즐거움을 만들었다.
3. 이런 사진 작품들이 경매에서도 고가에 거래되면서 ‘가장 비싼 사진’ 등의 타이틀로 주목 받은 작가는 작업 세계의 다음 단계를 보여주려는 시점에 있다.
○ 멀리서 보니 개미 같은 사람들
제가 거스키의 작품을 처음 본 것은 2018년 영국 런던 헤이워드갤러리 개인전이었습니다. 공공미술관인 이 곳이 리모델링을 거쳐 몇 년만에 다시 문을 열었을 때, 거스키의 사진 전시가 열려 많은 주목을 받았었죠.
그 이전에는 2001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MoMA) 개인전이 이 작가의 커리어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한국 전시에는 2018년 헤이워드에서 봤던 작품도 상당수 포함되어서, 작품의 흐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위 작품은 거스키가 20대 후반일 때 제작된 초기 작품입니다. 스위스 알프스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친구의 부탁으로 찍은 작품인데요. 다시 사진을 찍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현장에서 가까이 보면 산등성이에 서 있는 사람들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거스키는 사람들이 듬성듬성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별자리 같았다’고 회고합니다. 비행기에서 바라 본 땅 위의 반짝이는 불빛과 같은 느낌이었겠죠? 이 작품을 계기로 거스키는 아주 먼 곳에서 바라 본 시점을 통해 인간과 그 주변의 관계에 대한 탐구를 시작하게 됩니다.
이 작품이 그런 탐구의 결과물이자 대표작 중 하나인데요. ‘99센트’라는 제목처럼 대형 할인점의 전경을 아주 넓고 깊게 포착한 풍경사진입니다. 전시장에서 보면 사이즈가 상당히 큰 사진입니다. (높이 약 2m, 폭 3m 입니다.) 그래서 앞에 서면 어쩔 수 없이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우선은 이렇게 많은 상품이 한 자리에 진열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되고요.
그 다음은 이걸 다 사람들이 소비한다는 건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유혹하려는 휘황찬란한 색채의 향연이 정말 하나의 보기 좋은 그림처럼 느껴져서 매력을 느끼기도 하지요.
게다가 자세히 보면 상품을 고르는 사람들도 곳곳에 있고, 상품도 꽤 선명하게 보여서 앞 뒤로 움직이며 보는 재미가 있는 사진입니다.
이 작품에서 거스키의 첫 번째 특징을 알 수 있는데요. 바로 ‘대규모’입니다. 만약 작은 사진이었다면 전경 안에 있는 수많은 상품들과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겠죠. 그런데 시야를 가득 채우듯이 펼쳐지는 사이즈 덕분에 우리는 풍경 속에 잠겨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거스키는 여러 유명 사진 작가를 배출한 뒤셀도르프 아카데미 출신인데요. 이 곳에서 동료 화가 토머스 러프로부터 대형 작품을 하는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당시만해도 사진 작품들은 작은 사이즈에 흑백이 많았는데, 큰 사이즈에다 화려한 색상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습니다.
○ 현대 사회의 뜨거운 소재를 포착하다
그렇지만 사이즈만 크다고 해서 거스키의 사진 작품이 매력적인 것은 절대 아니겠죠. 거스키 작품의 두 번째 특징은 바로 핫한 소재와 장소를 포착하는 능력입니다. 앞서 본 대표작이 대형 마켓이었는데요. 또 다른 대표작을 보시면 아마 이 특징이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네 이 작품 역시 초대형 사이즈로 앞에 가면 작품 속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히 살펴볼 수 있습니다. 2009년 미국 시카고 선물 거래소를 포착한 작품인데요. 시간과 장소가 의미심장하죠?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라는 맥락을 생각해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마치 성냥갑처럼 칸막이가 나눠진 공간에 들어차 저마다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아주 멀리서 관찰하듯 보면, 차분하고 냉정한 마음이 든다고 해야 할까요. 금융가에서 매일매일 전투하듯 벌어지는 일들을 거시적 체계로 보니 만능이 아니었더라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메시지를 한 장면으로 전해주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재밌게도 이 시리즈가 거스키 작품 중 가장 인기가 많다고 하고요, 런던의 한 헤지펀드 회사가 이 작품을 걸어 놓기 위해 4-5점을 한 번에 소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좀 더 공감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바로 아마존 물류센터를 촬영한 작품입니다. 초반에 본 ‘99센트’와 비교해보면 더 재밌죠. 이제는 알고리즘의 계산에 따라 배치된 상품들이 슈퍼마켓 진열대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이 작품에 대해 과거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아마존을 욕하지만) 또 아마존이 너무 쉽고 편해서 그것에 매료된다. 무언가를 갖고 싶으면 (아마존을 통해) 바로 다음 날 받아볼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이렇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자 한다.”
즉 작가는 작품을 통해 자본주의나 소비주의 등 여러 가치관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하기보다 한 발 물러서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멀리서 바라보면 그런 입장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중요한 소재를 찾아 다니는 작가의 호기심은 놀랍게도 평양까지 닿았습니다. 위 작품은 2007년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열린 아리랑 축제의 장면을 담고 있답니다. 작가는 이 축제가 열리기 전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축제를 직접 촬영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고, 결국 2007년 초청을 받습니다.
위 사진 처럼 사람이 조그맣게 보일만큼 높은 곳에서 찍고 싶었던 작가는 매일 매일 좀 더 높은 곳에서 찍게 해달라 요구하며 결국 위와 같은 결과물을 얻게 됩니다. 한 눈에 펼쳐지는 수많은 동원된 사람들의 매스게임을 보며 다시 한 번 무엇이 이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는지, 관조해보게 됩니다.
○ 기술이 열어준 낯설게 보기
거스키의 사진들은 스케일에 압도되는 것과 동시에, 마치 한 번에 찍은 것 같은 자연스러움이 더 관조적이고 냉정한 기분을 자아내는데요. 그의 사진은 여러 시점을 한 사진 안에 조합한, 즉 기술적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입니다.
작가는 자신을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요. 작가가 원하는 특유의 이미지가 있으며 그것을 만족시킬 만한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색채와 구도, 시점 등 여러 가지를 수정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밝혔습니다.
위 작품은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장면을 작가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역대 독일 총리인 게르하르트 슈뢰더, 헬무트 슈미트, 앙겔라 메르켈, 헬무트 콜이 미국 작가 바넷 뉴먼의 그림 ‘인간, 영웅적이고 숭고한’을 나란히 앉아서 보고 있는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바넷 뉴먼의 그림에 나오는 세로줄과 창틀의 검은색 줄이 연결되면서 그림 속 그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앞서 살펴 본 아주 먼 거리에서 본 듯한 작품이 그의 대표작이라면, 이런 작품들은 작가의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전시장 마지막 방에 가면 한국에서 처음 공개되는 신작 ‘얼음 위를 걷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스키 코스를 담은 ‘스트레이프’도 신작입니다.
신문과 매거진을 즐겨 읽고, 그곳에서 아이디어를 얻곤 한다고 작가는 밝힌 바 있습니다. 그 덕분에 현실의 문제와 연결된 소재를 적절하게 짚게 된다고도 했는데요. 이 작품은 과거와 사뭇 다르게 합성된 티가 아주 많이 나서 흥미로웠습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마치 야외활동을 편히 할 수 없었던 지난 2년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는데요.
작가는 2018년 헤이워드 갤러리 전시를 마지막으로 2년 간 안식년을 가지며 ‘나만을 위한 작업’을 하겠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그 다음 과정의 결과물이 어떻게 펼쳐질지, 이 작품을 통해 한 번 직접 가늠해보세요.
전시 정보
Andreas Gursky 2022.3.31~2022.08.14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작품수 47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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