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3월 9일. 미 공군은 일본 도쿄에 무차별 대규모 공격을 퍼붓는 ‘미팅하우스 작전’을 시작한다. B-29 폭격기 300대로 구성된 제21폭격기 부대는 도쿄 중심가에 폭탄을 무더기로 떨어트렸다. 대량살상무기인 네이팜탄을 1665t 투하했다. 도시는 화염에 휩싸였다. 여성들은 자녀를 안고 뛰어다니다 불타 죽었다. 민간인들은 운하로 뛰어들었다가 익사했다. 단 3시간의 폭격으로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람 타는 냄새가 폭격기 안까지 파고든 탓에 미군은 부대로 복귀한 뒤 B-29를 소독했다.
제21폭격기 부대는 이후 일본 오사카, 고베 등 67개 도시에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했다. 폭격 때마다 민간인들이 수없이 희생됐다. 같은 해 8월 6일 미군은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다. 일왕은 곧바로 항복을 선언했다. 민간인들을 배제하지 않은 공격을 선택한 미군의 전략이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것이다.
‘어떤 선택의 재검토’(김영사)를 쓴 말콤 글래드웰은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뉴요커에서 일한 저널리스트다. 한국에선 1만 시간을 투자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을 소개한 사회과학서 ‘아웃라이어’(2009년·김영사)로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미군의 무차별 폭격에 대해 썼지만 민간인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으로 우크라이나가 신음하고 있는 상황이 머리 속에 스쳐간다. 저자는 우리에게 묻는다.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과 올바르게 끝내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달하던 1944년 미군은 괌, 사이판 등 서태평양 마리아나제도를 점령한다. 일본군이 주둔하던 마리아나제도는 곧 미군이 일본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변모한다. 당시 제21폭격기 부대를 이끌던 건 헤이우드 핸셀 준장이다.
핸셀은 폭격 대상을 세밀하게 조준해 타격하는 ‘정밀폭격’ 전술을 선호했다. 낮에 폭격기를 출동시킨 뒤 공장, 발전소 등 적국의 기반시설을 파괴하는 전술이었다. 하지만 핸셀의 전략은 연달아 실패했다. 적의 대공포를 피하려 구름 위를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며 정확한 위치에 폭탄을 투하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핸셀은 민간인 학살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항변했지만 미국 본토에선 결국 새 지휘관 커티스 에머슨 르메이 소장을 보냈다.
르메이의 선택은 핸셀과 정반대였다. 르메이는 정밀폭격을 포기했다. 르메이는 적의 대공(對空)공격을 피하기 위해 야간공습을 택했다. 표적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보단 광범위한 공격을 택했다. 목재 건물이 많은 일본을 공략하기 위해 최대 3000도까지 치솟는 네이팜탄을 썼다. 저자가 ‘사탄의 제안’이라고 부르는 선택이었지만 르메이에겐 명분이 있었다. 전쟁을 가능한 한 빨리 끝내는 것은 군 지휘관의 책임이자 자기 부하들의 목숨을 생각하면 전쟁에선 단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르메이의 결정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베트남전 등 다른 전쟁에서 네이팜탄 사용은 일상화됐다. 하지만 르메이의 결단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만약 르메이가 주저했다면 일본의 항복과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을지 모른다. 저자는 핸셀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만 영웅시 하진 않는다. 르메이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가하지만 역시 비난하진 않는다. 다만 그날 벌어졌던 ‘어떤 선택’을 재검토해보자고 말한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기에. 당신은 핸셀과 르메이 중 누가 옳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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