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 한 스푼 미리 보기: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하다, 그날 그 순간을 윤중식 1. 윤중식은 반세기 내내 석양 풍경을 그린다. 이는 실제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어릴 적 보았던 기억 속 고향의 석양을 떠올리며 그린 것이었다. 3. 그는 자신의 그림을 너무나 아낀 나머지 시장에 잘 내놓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생전 대중의 주목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죽는 날까지 석양을 그리다 간 ‘석양의 화가’라는 공고한 타이틀을 갖게 된다. |
기자 : 월남 도중 가족이 이산했다고 들었습니다. 윤대경 : 피난길에 갑자기 폭격이 가해지기 시작했어요. 아버지께서는 젖먹이 둘째 여동생을 업고, 한 손으로는 제 손을 잡은 채 달리기 시작하셨죠. 어머니는 첫째 누나와 함께 반대 방향으로 피신했고요. 그 후로 영영 두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셋이서 내려가다 둘째 여동생도 죽었어요. 젖먹이었거든요. 1·4 후퇴 피난길은 겨울길이었고, 우리는 먹을 게 없었죠. 기자 : 두 분이 도착한 곳은 어디인가요? |
기자 : 윤중식 화백의 아틀리에 공개는 처음 아닌가요? 학예사 : 윤중식 선생님은 가족들조차도 작업실에 잘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어요. 그러니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도 처음이 맞습니다. 작업실에 놓인 물건들을 보면 선생님께서 얼마나 그림 그리는 것 자체를 사랑하셨는지 아실 수 있습니다. 값이 비싼 캔버스 천을 구하기 힘들 때에는 도자기와 조개 위에도 그림을 그리셨어요. 기자 : 일상품이 캔버스셨네요. 학예사 : 그렇죠. 실제로 이번 전시에 출품된 작품 중 약 15점만 캔버스에 그려졌고 나머지는 하드보드지, 종이(캔트지), 박스지 등에 그려진 것들입니다. 작업실 한편에 놓아뒀던 항아리를 그린 출품작 ‘무제’도 케이크 받침대에 그린 그림입니다. 전시에 출품되진 않았지만 목가구의 문짝이나 과일포장 스티로폼, 심지어는 양파링 과자 포장지에도 그린 그림들이 있었죠. 기자 : 재현 공간 입구에 놓인 그림 ‘무제’ 속 모델은 누구인가요? 학예사 : 부인입니다. 윤중식 선생님은 서울에 정착하신 뒤 새로 가정을 일구셨어요. 전쟁통에 두 딸을 잃었지만 재혼한 부인 덕에 두 딸을 다시 얻게 되죠. 이 초상은 재혼한 부인의 얼굴인데요. 윤중식 선생님께서 별세하시기 한 달 전에 그린 그림입니다. 부인께서는 교통사고로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고, 윤중식 선생님은 거의 눈이 보이지 않으셨지만 그림은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기자 : 풍경화만 그리신 건 아니신가봅니다. 학예사 : 풍경이 윤중식 선생님 작품의 주를 이루는 건 맞지만, 실내 정물과 인물화도 즐겨 그리셨어요. 외향적인 성격이 아니셔서 주로 작업실에서 보낸 시간이 많다보니 그런듯합니다. 인물화의 모델도 대개가 손녀, 부모님, 부인 등 가족입니다. 기자 : 작업량이 적지 않은데 왜 대중에 덜 알려졌던 걸까요? 학예사 : 미술시장에 유통된 작품이 적기 때문이에요. 선생님께서는 작품을 판매하는 걸 꺼리셨어요. 작품이 흩어지는 걸 원치 않으셨거든요. 대신 선생님께서는 작품을 작업실에 손수 모아놓으셨습니다. 물론 상경 후 초반에는 몇몇 작품을 파시긴 했는데 그때마다 정말 안타까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여러 전시회에 초대되어도 응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오롯이 작업에만 몰두하셨고요. 팔레트 글귀에서 볼 수 있듯 선생님께서는 정말 그림 그리기 자체를 사랑하셨던 분이셨습니다. |
전시 정보 윤중식10주기 추모전 《회향懷鄕》 2022.03.20~2022.07.03 성북구립미술관(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성북로 134) 작품수 140여 점 ※‘영감 한 스푼’은 국내 미술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아래 링크로 구독 신청을 하시면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뉴스레터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영감 한 스푼 뉴스레터 구독 신청 링크 https://page.stibee.com/subscriptions/1511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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