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야기]밀양의 보물 영남루
유불선 함께 품은 영남루
아랑과 나비의 신비한 인연
건국시조 한데 모셔놓은 천진궁
《돌벼랑 위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누각에 서니 아래로는 바람 따라 일렁이는 물결 위로 녹색 풍경화가 펼쳐진다. 오솔길을 따라 산새 지저귀는 산사에 오르다 보면 이곳이 도심 한가운데라는 사실마저 잊게 된다. 수려한 경치뿐이랴. 이곳은 한민족 시조인 단군을 모신 사당, 조선의 빼어난 목조 건축물, 일제강점기 아픈 역사의 흔적 등 내력 깊은 유적지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전설의 고향’에서나 등장하는 설화 같은 실화(實話)가 전해져 신비로움을 더해준다. 바로 경남 밀양 시내에 있는 영남루(보물 제147호)다. 종교와 역사와 민속의 종합전시장인 영남루는 하루 온종일 노닐어도 지루함을 느낄 새가 없는 도심 여행지다.》
○거북 명당 누각엔 유불선이 한자리에!
사방이 탁 트인 누각인 영남루는 그 규모와 입지 환경이 빼어나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으로 꼽힌다. 밀양강을 굽어보고 있는 영남루는 지형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영남루 건너편 강변에서 바라보면 거북의 머리처럼 불룩하게 생긴 둔덕 위에 영남루가 서 있다. ‘영구음수형(靈龜飮水形·신령스러운 거북이 산에서 내려와 물을 마시는 형국)’으로 부를 만한 터다. 거북 머리인 둔덕에서 시선을 옮겨가면 거북의 목 부위인 잘록한 고개가 살짝 보이고, 바로 이어서 거북 등에 해당하는 아동산(88.1m)도 보인다. 이 일대가 모두 영남루 권역에 해당한다.
이 신령스러운 자리에 처음 터를 잡은 쪽은 불교다. 영남루는 신라 법흥왕 때 영남사의 부속 누각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진다. 영남루 명칭도 이 절 이름에서 빌렸다고 한다. 영남사가 폐사된 이후 고려 공민왕 때(1365년) 누각 규모를 크게 중수했고, 조선시대에 병화(兵禍)나 실화(失火)로 불타버렸다가 1844년 밀양부사 이인재가 현재의 건물 형태로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관청 건물(밀양도호부 객사)로 변신한 영남루는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의 2층 누각이다. 건물 좌우로는 능파당과 침류각이 본채를 호위하듯 배치돼 있다. 마치 새가 양 날개를 펼쳐 날아갈 듯한 모습으로 보이는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뛰어난 목조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풍채가 빼어난 외관만큼이나 누각 안의 단층 역시 창의적이면서도 화려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특히 유학을 신봉하던 관료 집단이 조성한 누각임에도 불구하고 도교를 상징하는 코드들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누각 네 귀퉁이에 배치된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는 도교적 성격이 짙고, 난간 끝의 빼곡한 구름 문양은 신선 세계를 의미한다고 한다.
영남루는 밀양을 방문한 신분 높은 사람들을 접대하거나 그들이 휴식을 취하는 장소로 활용됐다. 이 때문에 누각은 당대 명필과 문장가들이 남긴 현판들로 가득하다. 누각 안에는 현판 글씨마다 누가 언제 쓴 작품인지를 친절히 설명해 놓고 있어 감상하기가 좋다.
○아랑 전설과 밀양의 4대 신비
영남루 돌벼랑 아래 강변 쪽으로는 대나무 숲이 무성하다. 가파른 계단길을 따라 대나무 숲 사이를 걷다 보면 ‘아랑각’이라는 사당을 만나게 된다. 정절을 지키다가 억울하게 죽은 아랑의 넋을 위로하는 제단이다.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아랑의 사연은 이렇다. 조선 명종(재위 1545∼1567년) 때 밀양부사의 외동딸 아랑낭자(윤동옥)가 유모의 꾐에 빠져 영남루로 달구경을 나왔다가 치한의 습격을 받았다. 아랑은 죽음으로 정조를 지켰고, 시신은 유린돼 울창한 대나무 숲에 버려졌다. 졸지에 딸을 잃은 부사는 실의에 빠져 자리를 옮겼고 이후 새로 부임하는 부사들마다 첫날 밤 의문의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러다 담력이 센 부사가 부임해 낭자의 원혼으로부터 사연을 듣고서는 범인을 잡아들인다. 낭자의 혼이 나비가 돼 치한의 어깨 위에 앉았기 때문에 범인을 찾을 수 있었던 것.
그 후 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낭자의 원혼을 달래려고 세운 아랑각에서는 매년 음력 4월이면 밀양아리랑축제 때 뽑힌 규수가 제관이 돼 제사를 지낸다. 영남루 앞 밀양교 가로등에는 나비를 상징하는 조명등도 설치돼 있다. 밤이 되면 밀양교의 무지개 조명과 함께 발광다이오드(LED) 나비 조명이 환상적인 야경을 펼친다.
영남루엔 ‘아랑 나비’뿐만 아니라 ‘태극 나비’ 얘기도 있다.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전 어느 날 춘삼월이 아닌데도 태극 문양의 날개가 달린 나비 떼가 사방에서 날아와 영남루 일대 아동산을 뒤덮었다. 나라가 혼란스럽던 시절 사람들은 태극 나비가 길조일지 모른다고 기대했다. 과연 고려가 건국돼 나라가 안정을 되찾았다. 그 후에도 태극 나비가 나타날 때마다 나라에 경사스러운 일이 생겼다. 고려 초에는 이 나비를 보호하라는 명을 내리면서 ‘국성접(國成蝶)’이라고 부르게 하였다고 한다. 태극 나비는 그 후 보이지 않다가 1945년 8·15광복 때 아동산 중턱에 있는 무봉사에서 연달아 출현했고, 정부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1954년 4월 태극 나비를 우표로까지 제작했다.
영남루와 무봉사의 태극 나비 전설은 밀양의 4대 신비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밀양은 기이한 자연 현상이 나타나는 곳으로 유명하다. 한여름에도 얼음이 어는 재약산의 얼음골 결빙지, 나라에 변고가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표충비각과 신비한 모습의 향나무, 바위에서 종소리가 난다는 만어사 경석 등이 밀양의 대표적 신비물로 꼽힌다.
○어깨춤 들썩이는 놀이 공연
영남루 일대가 평범한 터가 아니라는 점은 천진궁(天眞宮)이라는 건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영남루 맞은편에 자리한 천진궁은 조선시대 객사 건물이던 요선관을 새롭게 단장해 민족의 시조인 단군 왕검 및 역대 건국 시조를 모셔놓은 곳이다. 단군 영정과 위패가 봉안된 가운데를 중심으로 왼쪽 동벽에는 부여, 고구려, 가야, 고려의 시조 위패가 있고 오른쪽 서벽에는 신라, 백제, 발해, 조선의 시조 위패가 있다.
천진궁 건립에는 사연이 있다. 1894년 동학혁명 이후 조선을 장악한 일본 헌병대는 영남루를 강점하고 요선관 건물을 옥사로 사용했다. 1910년 경술국치 때는 이곳의 전패(왕을 상징하는 위패)가 일제에 의해 땅에 묻히는 수난을 겪었고, 1940년에는 영남루 뒷산인 아동산 중턱에 일본 신사가 설치되면서 영남루 경관이 크게 훼손되기도 했다. 우리 민족의 정기를 압살하려는 일제의 간계였다. 그러다 광복 이후 밀양 유지들이 뜻을 모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천진궁의 원래 이름은 대덕전(大德展)이고, 그 출입문은 만덕문(萬德門)이다. 큰 덕을 의미하는 ‘대덕’과 만 가지 덕을 의미하는 ‘만덕’은 단군의 통치를 상징하는 코드다. 지금도 단군숭녕회가 매년 음력 3월 15일에는 어천대제를, 음력 10월 3일에는 개천대제를 이곳에서 봉행하고 있다.
영남루를 방문한 4월 말, 때마침 천진궁과 영남루 사이 널찍한 마당에서는 민속 공연이 신바람 나게 펼쳐지고 있었다. 6월 26일까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3시에 민속 공연이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국가 무형문화재인 밀양백중놀이를 비롯해 밀양법흥상원놀이(경남도 무형문화재), 감내게줄당기기, 무안용호놀이 등 다채로운 공연을 선보인다. 풍경을 즐기고, 역사를 음미하며, 더불어 전통 놀이까지 더해지니 어깨춤이 저절로 추어지는 듯했다.
영남루를 뒤로하고 아동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무봉사가 있다. 영남사의 부속 암자로 출발한 무봉사는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93호)으로 유명하고, 운치 있는 풍광 때문에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다.
무봉사는 밀양 출신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는 표충사와도 인연이 깊어서 인근에 사명대사 동상을 세워놓고 있다. 사명대사 동상을 지나면 밀양읍성과 밀양관아로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산책로 코스가 전개된다. 특히 밀양읍성의 망루에 올라서면 밀양강과 시내가 한눈에 들어와 장관을 이룬다. 이렇게 영남루 일대를 돌아다니다 보면 하루가 저물고, 밤이면 영남루 야경이 또다시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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