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인사를 나눌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올까. 인공지능(AI) 기술이 발달한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에서 작별은 구시대의 문화다. 애초에 이별이 필요 없다. 클라우드 서비스에 뇌를 백업해 두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든 사랑하는 사람과 만날 수 있다. 시스템에 스며든 정신은 네트워크를 따라 흐르며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몸이 없으므로 살아있다는 감각마저 느낄 수 없다. 당신이라면 고통도 기쁨도 없는 이 세계에서 영원불멸할 것인가.
저자가 ‘살인자의 기억법’(복복서가) 이후 9년 만에 내놓은 장편소설이 품은 질문이다. 2019년 온라인 전자책 플랫폼 ‘밀리의 서재’에서 짧은 장편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200자 원고지 420장 분량으로 집필했던 소설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전면 개작됐다.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집필을 끝낸 마지막 순간 초고에 붙였던 ‘기계의 시간’이라는 제목을 ‘작별인사’로 바꿨다고 밝혔다.
초고의 제목처럼 기계의 이야기로, 인간을 빼닮은 휴머노이드 철이가 주인공. 유명한 정보기술(IT) 기업 연구원인 아버지와 평화롭게 살던 소년 철이는 ‘휴머노이드 등록법’이 실시되면서 어느 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간다. 한평생 인간인 줄 알았던 자신이 미등록 휴머노이드였으며 존재 자체가 불법임을 알게 된 것. 해 질 무렵 노을을 바라보며 살아있음을 느끼던 몸은 수용소에서 거추장스럽고 고통스러운 짐이 된다.
팔이 잘려나가고 눈이 없는 로봇들…. 철이는 인간의 몸을 가지고 태어나 고통받는 휴머노이드와 함께 수용소를 탈출한다. 하지만 미등록 휴머노이드를 제거하려는 인간 기동대의 습격에 휴머노이드의 몸은 산산조각 나고, 철이 일행은 근원적인 질문과 맞닥뜨린다. 조각난 휴머노이드의 뇌를 클라우드 서비스에 백업해 불멸할 것인가.
영원불멸하는 기계의 시대, 육체 없이 정신만 남은 휴머노이드는 모든 고통을 느낀대도 “몸을 달라”고 말한다. 여정 끝에 철이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 그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언젠가 부서질지 모를 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쩌면 작별은 유한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누리는 특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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