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는 목마름으로’ 독재에 맞선 시인 김지하…그가 걸어온 길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8일 22시 2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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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으로 잘 알려진 시인 김지하가 8일 별세했다. 향년 81세.

토지문화재단 관계자는 이날 “투병생활을 하던 김 시인이 8일 오후 4시경 강원 원주시 자택에서 타계했다”고 밝혔다. 고인과 함께 살던 차남 김세희 토지문화재단 이사장 부부가 임종을 지켰다.

고인의 본명은 김영일(金英一). 김지하는 지하에서 활동한다는 뜻의 필명이다. 이름처럼 고인은 과거 군사 독재정권에 맹렬하게 저항한 행동하는 지식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1941년 전남 목포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9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한 이듬해 4·19 혁명에 참여했다. 당시 민족통일전국학생연맹 남쪽 학생 대표로 활동했다.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한 ‘서울대 6·3 한일 굴욕회담 반대 학생총연합회’ 소속으로 활동하다 체포돼 4개월간 수감됐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는 수배를 피해 항만 인부나 광부로 일하며 도피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고인은 1970년 월간지 ‘사상계’에 풍자시 ‘오적’(五賊)을 발표해 구속됐다. ‘오적’은 300줄 남짓한 풍자시로 독재시대 부정하게 부를 축적한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을사오적에 빗댔다. 판소리 가락을 도입하고 난해한 한문을 차용해 풍자했다. 정부는 사상계를 폐간한데 이어 오적을 실은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을 압수했다. 고인을 비롯해 사상계 대표와 편집장이 반공법 위반 혐의로 그해 구속됐다. 이어 고인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체포된 후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민주화 이후 2015년 법원은 고인이 오적 필화, 민청학련 사건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며 15억 원의 국가배상을 판결했다.

그는 참여시인이자 민중시인이었다. 1969년 ‘시인’지에 시 ‘황톳길’과 ‘비’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70년 12월 첫 시집 ‘황토’를 출간했다. 그의 시는 재기 넘치는 풍자 정신을 보여준다. 옥중에서도 민주주의와 자유에 대한 열망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시들을 선보였다. 이에 민주화의 상징이자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 문인으로 추앙받았다.

1987년 제주 4·3 사건을 다룬 시 ‘한라산’을 발표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투옥된 이산하 시인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오적’을 읽고 이것이 진짜 시이고 시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꽁꽁 얼어붙은 유신시대에 뜨거운 피를 가진 문학청년들에겐 충격적인 영향력을 준 시를 쓴 분이다. 책상에 앉아서 글만 쓰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준 시인”이라고 평했다. 구모룡 문학평론가는 “학문하는 사람들이 지식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고인은 1970년대 저항운동을 하며 언행이 일치하는 삶을 산 분”이라며 “자신이 터득한 사상을 글로 표출했다는 점에서도 큰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고인은 1971년 가수 김민기와 함께 야학 활동을 시작했다. 2년 후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인 고 박경리 선생의 외동딸 김영주와 결혼했다.

고인은 1980년대 이후 생명사상을 정립하는 데 몰두했다. 고인은 옥중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서적을 탐독하면서 생명사상을 깨우쳤다. 선불교, 동학, 생태학 책을 섭렵했다. 그는 생명사상과 관련된 여러 종교들을 포괄적으로 수용했다. 1990년대에는 절제의 분위기가 배어나는 내면의 시 세계를 보여줬다. 1992년 그 동안 써낸 시들을 묶어 ‘결정본 김지하 시 전집’을 출간했다. ‘중심의 괴로움’(1994년), ‘화개’(2002년), ‘유목과 은둔’(2004년), ‘비단길’(2006년), ‘새벽강’(2006년), ‘못난 시들’(2009년), ‘시김새’(2012년) 등의 시집을 꾸준히 펴냈다. 2018년 시집 ‘흰 그늘’과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마지막으로 절필 선언을 했다.

고인은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경찰에 맞아 숨지고 이에 항의하는 분신자살이 잇따르자 한 일간지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라는 칼럼을 기고해 논란이 일었다. 진보 진영에서는 “변절자”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10년 뒤 ‘실천문학’ 여름호 대담에서 칼럼과 관련해 해명하고 사과의 뜻을 표명했다. 2012년 박근혜 정부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하고 진보 문학평론가인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비판했다. 이 때문에 고인은 말년에 진보 진영 문인들과 교류가 적었다.

이근배 시인은 “1970년대 시인 뿐 아니라 논객조차도 군부세력을 비판하는 글과 시를 못 쓰던 시절 고인은 시 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 ‘오적’을 발표한 고인은 유신 시대의 지성이다. 고인만큼 정치적으로든 사상적으로든 당시 폭발적인 문인은 없었다”고 말했다. 유자효 한국시인협회 회장은 “그야말로 대시인이자 세계적인 시인이 떠나갔다”고 애도했다.

고인은 명지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동국대학교, 원광대학교에서 석좌교수를 지냈다.

유족으로는 장남 김원보 작가와 차남 세희 이사장이 있다. 빈소는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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