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대병원 밖까지 놓인 시신들 보며 ‘5·18 증언자’ 결심”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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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회고록’ 펴내는 돌린저씨
美평화봉사단 일하다 참상 목격
사진으로 남겨 AFP-AP 등 보도

1980년 5월 21일 광주 전남대병원 영안실에서 말없이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시신을 바라보는 한 남성. 데이비드 돌린저가 촬영했다.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1980년 5월 21일 광주 전남대병원 영안실에서 말없이 5·18민주화운동 희생자 시신을 바라보는 한 남성. 데이비드 돌린저가 촬영했다. 데이비드 돌린저 제공
1980년 5월 18일 그는 우연히 광주에 있었다. 지인의 결혼식이 광주에서 열린 터였다.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1978년부터 3년째 전남 영암군 보건소에서 일하던 당시 스물다섯의 데이비드 돌린저(66·사진)는 광주버스터미널에서 영암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도시 곳곳이 순식간에 최루탄 연기로 자욱해졌다. 시외버스마저 끊겼다. 하루 묵을 곳을 찾기 위해 지인 집으로 가는데 광주 시내의 모습은 전날과 달라져 있었다. 도청으로 가는 길목에 군용 트럭과 무장 군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다음 날 버스 운행이 재개돼 영암으로 돌아간 뒤에도 광주에서 목격한 장면을 잊을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광주에 가지 말라고 말렸어요. 너무 위험하다고요. 하지만 가야 한다는 내면의 목소리를 들었어요. 광주에서 알고 지낸 한국 친구들이 너무 걱정스러웠습니다.”

그가 나흘 뒤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다시 광주로 향한 이유다. 일주일간 광주 시내 병원과 영안실을 뛰어다니며 유족들의 목소리를 기록했다. 그가 자신이 겪은 5·18민주화운동을 회고한 신간 ‘나의 이름은 임대운’(호하스)을 12일 펴낸다. 임대운은 그의 한국 이름. 그는 7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게 ‘진실을 널리 알려 달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광주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전남대병원 영안실로 향했다. 영안실에 시신을 둘 자리가 없어 건물 밖 공터에 시신들이 놓여 있었다. 그는 “자식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거리의 임시 안치소를 찾아 헤매는 부모들을 봤다. 자식의 억울한 죽음을 토로하는 부모들을 보고 광주의 증언자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는 병원과 시신안치소를 찾아다니며 촬영한 필름을 독일인 선교사 하인리히 로스러 부부에게 건넸다. 이를 통해 1980년 7월 프랑스 통신사 AFP와 미국 AP통신, 스웨덴 신문 다겐스 뉘헤테르에 광주의 참상이 보도될 수 있었다.

“1980년 5월의 광주는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어요. 많은 이들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광주의 진실을 계속 알리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1980년 6월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미국 템플대에서 미생물학과 면역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35년간 감염병 전문가로 일하며 많은 이의 생명을 구했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도 멈추지 않았다. 1990년 미국 하버드대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10주년 추모행사에서 자신이 목격한 걸 증언했다. 42년 만에 회고록을 낸 이유도 “광주 민주항쟁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서”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한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벌어진 일을 증언할 겁니다.”

#전남대병원#5·18 증언자#광주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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