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상 차려놓고 기다리던 고객도, 택배 사라졌다며 의심하던 고객도”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13일 03시 00분


택배기사 26년 서영길씨의 메모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 책으로
“사람 탓 힘들고 사람 덕분 버텨”

택배기사 서영길 씨가 매일 쓴 메모장(위쪽 사진). 8일 인천 터미널에서 택배상자를 옮기는 서 씨. 그는 “지금은 고객이 아니지만 언젠가 그 집으로 배송 갈 수 있기에 마주치는 모든 분에게 인사한다”고 했다. 서영길 씨 제공
택배기사 서영길 씨가 매일 쓴 메모장(위쪽 사진). 8일 인천 터미널에서 택배상자를 옮기는 서 씨. 그는 “지금은 고객이 아니지만 언젠가 그 집으로 배송 갈 수 있기에 마주치는 모든 분에게 인사한다”고 했다. 서영길 씨 제공
‘갑자기 충격으로 내 차가 심하게 요동치고 좌우로 흔들렸다. 내가 사고를 내다니…. 정신이 아찔하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객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또 너무 조급해졌나 보다.’

1998년부터 택배 일을 시작한 26년 차 택배기사 서영길 씨(58)는 택배상자를 운반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매일 메모장에 적었다. 예정된 배송 시간을 지키려다 교통사고가 날 뻔한 순간, 이틀에 한 번꼴로 물건을 주문했던 주지 스님이 매번 박카스 두 개를 손에 쥐여주던 기억, 생굴은 상할 수 있어 바로 전달해야 하는데 고객과 연락이 닿지 않아 난감했던 날…. ‘큰딸’(35)은 메모를 보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서 씨가 말하고 큰딸이 글로 적은 ‘모두가 기다리는 사람’(어떤책)이 10일 출간됐다. 8일 두 저자를 전화로 만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큰딸)

책은 서 씨가 25년간 택배 일을 하며 겪은 희로애락이 녹아 있다. 가장 자주 벌어지는 고객과의 마찰은 택배가 분실됐다는 고객 불만. 물건이 모이는 터미널에 폐쇄회로(CC)TV가 설치돼 있고, 배송트럭 앞 블랙박스도 상시 녹화 중이다. 기록들이 있어도 경찰에 신고하는 ‘진상 고객’도 있다. 서 씨는 “내가 물건을 들고 건물에 들어가 빈손으로 나오는 모습을 경찰이 확인해 고객에게 설명해도 그럴 리 없다며 우길 땐 난감했다”고 말했다.

“내가 갑인데 왜 택배기사가 갑 노릇을 하죠?”라며 막말을 하는 고객을 만나면 서글프다. 새벽에 술에 취해 우는 고객의 전화를 받았을 땐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다. 2000년 초 나이가 지긋했던 한 여성 고객은 “배송이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라고 전화로 설명했음에도 6시 50분부터 “왜 안 오느냐”고 전화로 재촉했다. 도착해 보니 오기로 한 시간에 맞춰 저녁상을 준비해 놓았던 것. 배송을 갈 때마다 고객은 6시 50분에 저녁밥을 차리고 그를 기다렸다.

“그분들의 따뜻함에 이유가 없었어요. 단지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신 거죠. 저도 되돌려받기 위한 친절이 아니라 되돌려주기 위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서 씨)

“아주머니가 새우만두를 늘 싸주셨어요. 중학생 때 먹은 그 맛이 아직도 기억나요.”(큰딸)

그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7시 터미널로 출근해 배달할 물건을 차에 실은 뒤 오후 8시까지 배송을 다닌다. 하루 13시간 가까이 수십 명의 고객과 만나는 그는 “사람 때문에 힘들지만 사람 때문에 버틴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으로 비대면 배송이 되면서 문 앞에 간식 상자를 두는 고객, ‘빨리 배송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커피 쿠폰을 보내는 고객까지….

“내 일이 힘든 육체노동으로만 축약될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겪은 일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다 보면 택배기사를 향한 편견이나 처우도 바뀔 거라 믿어요. 언제까지 이 일을 할 거냐고요? 다리에 힘이 풀릴 때까지요.”

#26년 차 택배기사#서영길 씨#모두가 기다리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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