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 한옥과 중국집에서 느끼는 예술가의 흔적[영감 한 스푼]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5월 14일 11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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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 한옥이 준
세 가지 영감

권순철, <한국인의 얼굴을 찾아서> 의 일부, 1979년
권순철, <한국인의 얼굴을 찾아서> 의 일부, 1979년


여러분 안녕하세요,

화창한 봄 날씨가 끝나기 전에 나들이를 떠나려는 독자 분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서울 내 여러 곳 중 서촌도 날씨 좋은 날 찾을 만한 곳이죠. 특히나 서촌 구석구석 자리하고 있는 한옥은 여러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같은 한옥을 두고도 관심사에 따라 갖게 되는 감정이 다르다는 것, 생각해 보셨나요?

어떤 사람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고,

또 다른 사람은 도시에서 쉽게 접하지 못하는 새로움에 끌리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아담한 한옥 벽 앞에서 셀카를 찍어 소셜 미디어에 공유하고 싶고,

내 취향대로 살아보는 한옥 라이프를 꿈꿔보는 사람도 있겠죠.

그리고 부동산 가치를 머릿속에 그려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예술가들은 한옥을 두고 어떤 영감을 받았을까요? 오늘 소개할 전시는 바로 그런 영감을 세 가지 각도로 가볍게 살펴볼 수 있는 곳입니다.

서촌 한옥집이 준 세 가지 영감

가슴이 두근두근: 권순철, 이강소전

이강소 작가는 한옥의 벽에 문과 창문, 골목길을 담은 대형 사진을 설치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이 사진들은 시멘트 벽, 벽돌, 창틀의 질감에 집중하게 만든다.

권순철 작가 의 작품에서도 거친 벽을 연상케 하는 질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질감은 그림 속에서 한국의 역사나 사람들의 얼굴과 맞물리면서 또 다른 의미를 형성한다.

전시가 열리는 ‘창성동실험실’을 운영하는 이기진 교수는 무채색의 한옥에 경쾌한 색채를 더해 자신만의 취향과 개성을 드러낸다.

○ 막힌 벽의 의미를 낯설게 보기
이 전시는 서촌의 한옥을 개조한 공간 ‘창성동실험실’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작년 9월 권순철 작가가 드로잉 작품을 선보인 적이 있는데요. 이 때 전시장을 찾았던 이강소 작가가 공간에 상당한 흥미를 갖고, 2인전을 제안하면서 이번 전시가 열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강소, 권순철 작가는 서울대 회화과에 함께 다녔던 선후배 사이로, 1964년 서촌 누하동에서 작업실을 같이 쓰기도 했답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아래와 같은 광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이강소 작가의 설치 작품 ‘몽유’입니다.

이강소, 몽유, 2022년
이강소, 몽유, 2022년


원래 이 곳은 한옥의 흰 벽이 세 면으로 둘러싸고 있는 공간입니다. 이강소 작가는 이 곳의 세 벽 사이즈를 측정한 뒤, 공간에 딱 맞는 크기로 사진 작품을 설치했습니다.

천정에 켜진 노란 조명 아래 회색빛의 골목길과 시멘트벽이 마치 닫힌 벽이 새로운 공간으로 열린 듯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제목 ‘몽유’(夢流)는 꿈에서 흐르다, 혹은 꿈속을 걷는다는 의미로 보이는데, 한옥집 속 공간을 꿈 등 현실이 아닌 다른 차원으로 가져간다는 의도로 해석이 됩니다.

이렇게 한 공간을 평소와는 다른 낯선 의미로 변주하는 것은 이강소 작가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입니다. 1970년대 퍼포먼스 작품 <소멸(선술집)>이 대표적입니다.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년
이강소, 소멸(선술집), 1973년


1973년 이강소 작가가 명동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을 때 입니다. 작가는 화랑에 선술집에서 쓰는 테이블과 의자를 가져다 놓고 관람객에게 막걸리와 안주를 제공합니다. 화랑 앞에는 ‘선술집’이라는 입간판이 내걸렸습니다.

그러자 전시를 보러 온 사람들이 각자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화랑이었던 공간이 의자, 테이블, 그리고 사람들로 인해 한 순간에 선술집으로 바뀐 것이죠. 관객이 완성하는 퍼포먼스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작가는 벽 위에 사진으로 만든 다른 벽을 세워 다른 공간으로 관객들을 초대합니다. 간단한 아이디어로 관점을 바꾸는 재치가 흥미롭죠. 아마도 이 공간에서 어떤 감흥을 느껴야 하는가에 대해서 작가는 관람객의 몫으로 돌릴 것 같습니다.
○ 역사를 담은 두꺼운 벽
전시장에서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비교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두 작가의 작품의 표면에서 볼 수 있는 거친 질감의 각기 다른 의미였습니다.

먼저 이강소 작가의 사진 작품에서, 한옥의 하얀 벽과 대조되는 회색의 거친 시멘트벽을 발견할 수 있는데요.

이강소, 몽유, 2022년
이강소, 몽유, 2022년


실제로 보면 사이즈가 크고, 전시장의 조명이 어두운 편이어서 사진 속 회색 벽의 울퉁불퉁한 질감이 훨씬 더 생생하게 다가옵니다.

이 벽의 뒤편 공간에는 권순철 작가의 작품이 자리하고 있는데요. 권순철 작가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거친 질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권순철, 넋, 1995년
권순철, 넋, 1995년


재밌게도 이 작품의 반짝이는 은빛과 거친 질감은 겉모습만 보면 시멘트벽과 유사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작품 속에서 휘몰아치는 듯한 형체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여기에 못으로 박힌 목장갑, 공장을 연상케 하는 기계 장치, 하이힐과 깡통이 거친 표면 속에 특정한 사람들의 흔적을 밀어 넣고 있습니다. 목장갑을 끼고 일하는 사람, 혹은 하이힐을 신고 걸어가는 사람 등이 그렇겠지요.

권순철, ‘넋’ 일부
권순철, ‘넋’ 일부
이렇게 같은 거친 표면을 두고 두 작가가 받은 각기 다른 영감이 제겐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이강소 작가는 매끈한 흰 벽 위에 시멘트벽 사진을 세우는 것으로 관객이 다른 느낌을 가져보길 의도하고 그 이상의 개입은 하지 않습니다. 마치 누군가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쿡 찌르는 느낌입니다.

이에 반해 권순철 작가는 두껍게 쌓아 올린 물감의 거친 표면 아래 한국이 겪었던 역사와 그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작가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며, 몸으로 직접 겪은 시대의 이야기를 자신만의 조형 언어로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죠. 권순철 작가가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한국인의 얼굴’과 ‘한국성’을 탐구해 온 것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권순철 작가가 기차역, 병원, 시장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을 스케치한 그림들.
권순철 작가가 기차역, 병원, 시장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얼굴을 스케치한 그림들.


작년 창성동실험실 드로잉 전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서울역에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 등장하기도 했답니다. 또 권순철 작가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에도, 또 한국에 와서도 인체 드로잉을 매주 하면서 꾸준히 인간에 대한 탐구를 해 왔는데요. 그러한 움직임이 쌓여 추상화처럼 보이는 회화의 거친 표면도 마치 주름진 살갗과 같은 생생함이 느껴집니다.

권순철, 넋, 1994년
권순철, 넋, 1994년


약 60년 전 두 작가가 함께 작업했던 지역에서 다시 만나, 각자가 걸어왔던 길을 압축적으로 나마 돌아보는 것 같은 전시입니다. 여러분도 직접 이 공간에 가셔서 두 작가가 받은 영감, 그리고 내가 한옥에서 받은 영감을 한 번 비교해보세요.
○ 창성동실험실과 영화루
그런데 제가 레터의 제목을 ‘한옥집이 준 세 가지 영감’이라고 말씀드렸죠?

권순철, 이강소 작가 외 나머지 하나의 영감은 바로 이 공간을 꾸려낸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의 이야기입니다. 이기진 교수는 2007년 폐가였던 한옥을 고쳐 지금의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전시가 열리기도 하고, 때로는 동네 사람들이 모여드는 아지트이자 작업실로 사용되는 재밌는 공간입니다.

이기진 교수도 직접 일러스트와 조각 작품을 만들기도 하는데요. 서울 골목길의 아름다움이나, 오래된 것들의 매력을 털어 놓는 저서를 여러 권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갖고 있는 고유의 취향을 이 공간 곳곳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우선 무채색이었을 것 같은 집의 문은 샛노란 페인트로 단장했고, 그 옆에는 초록색 간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또 집 안으로 들어가는 길옆에는 식물들이 활기를 더하고, 뒤뜰로 나가면 커다란 옹벽 옆에 텃밭과 야외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알록달록한 테이블이 등장합니다.

항아리, 물 조리개, 의자와 비누까지. 사소해 보이는 소품 하나도 유심히 관찰해보세요. 아마도 이기진 교수의 애정이 깃든 물건들일 가능성이 큽니다.



서촌의 또 한 곳을 소개해드릴게요. 오래된 식당 영화루인데요. 이곳 2층이 바로 과거 이강소, 권순철 작가가 함께했던 작업실이었다고 합니다. 더 이전에는 한묵 작가의 작업실이기도 했다는데요.

1950년대에 서촌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았다네요. 그래서 천경자 작가가 지나가다 “한묵 오빠!”라고 부르면 2층에서 한묵 작가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고 인사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그러면 작가들은 2층으로 몰려가 또 다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네요.

지금도 2층이 식당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예술가들의 오래된 흔적을 느껴보고 싶다면 한 번 들러보세요.

▶전시 정보

가슴이 두근두근: 권순철, 이강소
2022.5.3~2022.5.29
창성동실험실
작품수 10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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