쑹녠선(宋念申) 중국 칭화대 역사학과 교수가 최근 번역 출간된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너머북스)에 쓴 서문이다. 이 책은 두만강 국경을 둘러싼 조선, 청, 일본의 쟁탈사를 다뤘다. 번역을 맡은 이원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 교수(45)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세기 말 벌어진 두만강 국경 쟁탈사에는 동아시아의 근대사가 녹아 있다”고 말했다.
3국 간 국경 쟁탈전의 뿌리는 18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70년대 함경도에 극심한 자연재해가 들이닥치자 1881년 조선인 수천 명이 두만강 북쪽 황무지로 진출한 것. 이전에도 조청 국경에서 이주가 이뤄졌지만 러시아가 1860년대 두만강 인근의 만주지역을 차지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이 일대로 주민을 이주시켜 국경을 획정하려고 했다. 만주를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자 한 일본은 1907년 이곳에 사는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통감부 간도파출소를 세웠다. 당시 조선인에게 간도는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탈출구이자 항일운동의 근거지였다. 이 교수는 “간도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가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근대국가가 형성된 동아시아 근대의 바로미터”라고 설명했다.
두만강 국경 쟁탈전은 조선이 일제에 국권을 사실상 빼앗긴 뒤 1909년 청일 간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일단락된다. 앞서 1712년 조청은 백두산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4km, 해발 2200m 지점에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선을 정했다. 비석에는 ‘서쪽으로는 압록(鴨綠), 동쪽으로는 토문(土門)을 경계로 한다’고 새겼는데 토문강 위치를 놓고 두 나라의 입장이 갈렸다. 조선은 송화강 지류로 봤지만 청은 두만강이라고 주장했다. 간도협약 체결 당시 일제는 청으로부터 간도지역 철도 부설권과 탄광 채굴권을 얻는 대신 청의 두만강 국경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간도는 청의 영토로 공식적으로 귀속된다. 이 교수는 “두만강 국경 분쟁은 특정 국가 관점에서 보면 침탈사로 비친다. 신간은 두만강이라는 변경에서 동아시아 근대가 태동하는 과정에 주목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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