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사(野史)는 언제 읽어도 재밌다. 여기에 마치 영화를 보듯 생생한 사람 이야기가 더해지면 게임 끝이다. 더구나 베일에 싸인 정보기관 이야기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영화로도 제작돼 큰 인기를 끈 베스트셀러 ‘남산의 부장들’ 저자가 속편을 냈다. 이번에는 저자 표현대로 시작부터 ‘유혈 낭자했던’ 제5공화국의 국가안전기획부장들 이야기다. 베테랑 언론인 출신답게 전직 안기부 요원부터 청와대 관계자, 외국 학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인터뷰를 통해 1980년대 한국 정보기관의 민낯을 생생히 드러냈다.
5공 안기부의 서막은 12·12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으로, 쿠데타 직후 중앙정보부(안기부의 전신) 부장에 ‘셀프 취임’한 전두환이 열었다. 그는 1980년 6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에 취임하기 전까지 약 한 달간 중정을 직접 이끌며 연간 예산의 15%에 달하는 120억 원을 통치자금으로 쓴다. 국가안보 예산을 정치자금으로 전용한 것이다.
책에서는 검찰, 경찰, 군 수사기관 등 모든 사정기관 위에 군림하며 초법적 권한을 행사한 안기부의 파워게임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이 중 1982년 6월 터진 대원각 외화 밀반출 사건을 계기로 안기부가 검찰과 사법부를 옥죈 사례가 눈길을 끈다. 당대 유명 요정 대원각을 소유한 이경자 씨 등이 27만 달러를 해외로 빼돌리려다가 적발됐는데도 보석으로 석방된 데 이어 검찰이 항소를 포기한 것. 뭔가 수상한 냄새를 맡은 안기부가 대법원장 비서관과 변호사를 남산 지하실로 끌고 가 이 씨로부터 뇌물을 받고 사건을 무마했다는 자백을 받아낸다. 안기부는 이창우 서울지검장의 방을 몰래 뒤져 이 씨의 남편에게 받은 호텔 숙박권도 찾아낸다. 이로 인해 당시 검찰과 법원 간부들이 대거 옷을 벗었다. 저자는 증인들의 입을 빌려 안기부가 각종 시국사건에서 마찰을 빚은 검찰, 법원을 길들이고 조직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벌인 공작이었다고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고문 수사의 명수였던 안기부가 대검 중앙수사부의 가혹행위를 고발한 대목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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