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색 반팔, 반바지의 운동복, ‘UFC’가 적힌 커다란 백팩. 그을린 피부에 다부진 체격 의 곽경훈 작가(44)는 언뜻 보면 운동선수 같지만 경기 성남시 분당제생병원에서 일하는 11년차 응급의학과 전문의다.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카페에서 만난 그는 “오늘 새벽까지 당직을 서고 병원에서 자다 와서 옷을 못 갈아입었다”며 웃었다. 러닝 5km, 로잉머신 1만km, 주짓수 세 가지 중 하나를 매일 1시간씩 하기에 운동복 차림일 때가 많다.
“응급실에서는 긴장된 상황에서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을 내려야 하기에 체력이 굉장히 중요해요. 피곤하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귀찮아 지거든요. 그 때 사고가 발생해요.”
그는 운동선수만큼 체력단련에 열심인 의사이면서 글을 쓰는 작가이기도 하다. 8일 나오는 ‘응급실의 소크라테스’(포르체)는 그의 6번째 책이다. 책은 그가 응급실에서 만난 환자와 보호자, 선후배 의사 등을 통해 느낀 점을 담았다. “응급실은 사회의 꼭대기부터 바닥까지 모든 사람이 옵니다. 사람의 욕망과 약점이 가감없이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죠. 응급실에서 본 인간군상을 통해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인간의 ‘욕망과 약점’을 담고 싶었다는 설명에 맞게 책에는 ‘피곤해서 쉬러 왔다’며 응급실 ‘베드’(침대)를 요구하는 국회의원부터 종교적 신념으로 환자의 수혈을 거부하는 가족까지 영화에서 볼 법한 장면들이 펼쳐진다. 곽 작가가 오래도록 잊지 못하는 환자들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다. 의료보험이 없어 당뇨병을 제때 치료받지 못해 케톤산증이라는 중증질환으로 악화한 불법체류자, 자식이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패혈증으로 사망할 수 있는 담관염을 진단받았음에도 “병원비가 없다”며 집으로 가겠다는 아버지….
“몇 년 전 한 트랜스젠더가 DOA(도착 당시 사망)로 실려왔어요. 혼자 집에서 쓰러졌는데, 그날 일하던 바에 출근하지 않아서 동료가 그 집에 갔다가 죽은 걸 알게 됐죠. 가족도 아무도 없이 동료 혼자 응급실에서 서럽게 울더라고요. ‘살아서 차별받다가 죽을 때도 혼자 가는구나’라는 생각에 씁쓸했죠.”
갑질하는 권력자들, 목숨을 걸어야 하는 가난에 무뎌진 자들, 학대받는 아이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매일 목격하지만 그는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불법체류자니까, 성소수자니까 어떠할 것이다’라는 식의 인간을 향한 선입견이 많이 깨졌어요. 교육수준이나 빈부, 국적을 떠나 내가 진심을 갖고 선의로 대하면 상대방도 나에게 선의를 갖고 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유년시절 소설가와 인류학자를 꿈꿨지만 부모님의 권유와 현실적 판단으로 의사가 된 그는 작가의 꿈도 놓지 않고 있다. 지난해에만 4권의 책을 출판사들과 계약했다. 주로 응급실에서의 경험담을 다룬 에세이를 썼지만 최근에는 다크 판타지 장르의 소설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응급의학과 의사의 예측불가능성과 현장성을 사랑하기에 작가와 의사, 둘 다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어린왕자’를 쓴 생 텍쥐페리도 성공한 작가가 됐지만 여권의 직업란에 늘 조종사라고 썼을 만큼 비행을 사랑했어요. 저도 ‘해리포터’같은 책을 써서 억만장자가 되더라도 응급의학과 의사 일은 계속 하면서 글을 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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