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백설공주, 라푼젤…. 서구 유럽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說話)는 동화책은 물론 디즈니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돼 전 세계 어린이들의 가슴속 깊은 곳에 뿌리내린 지 오래다. 30년 넘게 구비문학을 연구해온 신동흔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59)는 서구 유럽의 설화보다 우리 주변에서 살아가는 이주민들이 품고 있는 옛 이야기가 궁금했다. 경기 양평에 위치한 그의 집 주변에는 중국 출신 이주민이 산다. 한 동네에서 베트남,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여성을 손쉽게 만날 수 있다. 어쩌면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서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서구 유럽의 설화들은 익히 알려져 있는데, 정작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동남아시아 출신 이주민들의 이야기에는 귀 기울이지 않았어요. 어쩌면 진정 새로운 이야기는 그들로부터 나오지 않을까요.”
신 교수와 오정미 인하대 다문화융합연구소 학술연구교수(46), 김정은 건국대 서사문학치료연구소 학술연구교수(48) 등 구비문학 연구자 16명이 합심해 2016년부터 3년간 캄보디아, 필리핀, 베트남, 인도네시아, 카자흐스탄 등 27개국 출신 이주민 136명으로부터 1364편에 달하는 구전설화를 정리한 ‘다문화 구비문학대계’ 21권(북코리아)를 지난달 15일 펴냈다. 13일 서울 광진구 건국대 연구실에서 만난 이들은 “옛 이야기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라고 말했다.
언어나 국가는 달라도 옛 이야기에는 결국 사람 사는 얘기가 담겼다. 2017년 12월 김 교수가 경북 경산시에서 만난 베트남 출신 이주여성 부티프엉 씨(32)는 첫 만남의 낯섦도 잠시.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우리나라에도 콩쥐팥쥐와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며 ‘의붓자매 떰과 깜’ 설화를 들려줬다. 새엄마가 자신의 딸 떰과 함께 의부 딸 깜을 학대하다 벌을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콩쥐를 괴롭힌 팥쥐를 젓갈로 담갔듯 깜을 젓갈로 담가 벌을 주는 방식까지 똑같았다. 언어는 달라도 서로 닮은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를 학대하면 처벌받는다는 공통의 가치관을 공유한 것. 그뿐일까. ‘망태 할아버지’ 설화는 문화권에 따라 할머니로 변주되는 차이가 있지만 부모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닮았다.
“우는 아이를 달래려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내는 부모의 모습은 전 세계 어디서나 똑같아요. 겉모습은 달라도 우리는 결국 같은 인간이니까요.” (오 교수)
설화는 서로 다른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통로가 돼주기도 한다. 필리핀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첫 번째 원숭이 루파네스’가 대표적이다. 동물의 가죽을 벗겨 질기고 강한 옷을 만들어 팔던 상인에게 분노한 신이 그를 털가죽에 뒤덮인 원숭이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속에는 동물의 생명을 중시하는 필리핀의 문화가 깃들어 있다. 오 교수는 “저개발국가라고 여겨졌던 동남아시아 국가의 설화에는 자연과 공존하고 타인을 포용하는 문화가 뿌리내리고 있다. 3년간의 연구를 통해 오히려 내 안의 편견을 돌아보게 됐다”고 웃었다.
김 교수는 3년간 엮어낸 ‘다문화 구비문학대계’를 바탕으로 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동화를 제작하는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주민들이 들려준 설화가 다문화사회에서 살아갈 우리 아이들에게 다름을 받아들일 양분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책에 담긴 1364편의 이야기는 이미 우리사회 구성원이 된 이주민들이 우리말로 풀어낸 우리의 문화자원입니다. 앞으로 이들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를 더욱 다채롭게 만들어줄 거라고 믿어요.” (신 교수)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