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6021원 모여… 본보, 한달간 명단 실어
위토 되찾고 남은 돈으로 이듬해 현충사 중건
충무공 유적 보존 모금 운동은 ‘2000원에 경매당하는 이충무공 묘소 위토’라는 제목의 1931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특종 기사에서 비롯됐다. 이날 동아일보는 사회면에 “임진란, 거북선과 함께 역사를 지은 민족 은인 이 충무공의 위토 60두락지기가 장차 경매에 넘어갈 운명에 있다”고 보도했다. 충무공 13대 종손 이종옥 씨가 충남 아산 음봉면의 충무공 위토를 담보로 진 빚을 못 갚아 은행 경매에 넘어갈 위기라는 것. 다음 날 독립운동가이자 동아일보 논설위원인 위당 정인보(1893∼1950)가 ‘민족적 수치’라는 제목으로 1면 사설을 썼다.
“충무공의 위토와 묘소가 넘어갈 처지에 이르렀음은 민족적 수치에 그치지 않고 민족적 범죄다.”
이후 “충무공 위토를 지켜 달라”는 편지와 성금이 동아일보에 쏟아졌다. 보도 다음 날인 14일부터 최태식 씨 등 5명이 ‘우리들의 주머니를 긁어모아 충무공 묘소와 위토를 찾자’는 편지와 5원을 보낸 게 시작이었다. 보도 후 열흘 만에 모인 성금이 1578원13전. 동아일보 주도로 결성된 ‘이충무공 유적 보존위원회’에 따르면 1931년 5월 16일부터 이듬해 6월 5일까지 약 2만 명, 400여 단체로부터 총 1만6021원30전이 모였다. 현재 가치로 약 10억 원에 달한다. 동아일보는 1931년 5월 23일자부터 6월 말까지 한 달여간 한 면을 털어 성금 기탁자 명단을 실었다.
이 덕분에 유적 보존위원회는 1931년 6월 11일 2272원22전을 내고 은행으로부터 충무공 위토를 되찾았다. 남은 돈으로는 1932년 충남 아산 백암리 충무공 고택 옆에 현충사를 중건했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춘원 이광수(1892∼1950)는 모금 운동을 계기로 이듬해인 1932년 6월부터 178회에 걸쳐 직접 쓴 장편소설 ‘이순신’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문화재청은 성금 편지와 지출장 등 4254점을 지난달 30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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