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57·사진)가 2020년 저술한 ‘인삼의 세계사’(휴머니스트)가 8일 영국 루트리지 출판사를 통해 번역 출간돼 세계로 진출한다. 루트리지는 1836년 창립한 이후 루트비히 비트켄슈타인, 장 폴 사르트르, 버트런드 러셀 등 최고 지성의 책을 펴낸 인문학 분야 세계 최대 규모 출판사다. 캐나다 역사학회는 설 교수의 ‘인삼의 세계사’를 서평 목록에 올려놓았을 정도로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서구 학계가 가장 한국적인 인삼의 세계사에 주목한 이유는 뭘까.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는 “이 책은 서구 중심적인 시각에서 볼 수 없었던 문화교류사의 빈틈을 채웠다”고 평했다. 17, 18세기 서구에서 인삼은 무역과 의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품이지만 그간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
설 교수는 이 책에서 인삼을 둘러싼 세계 교류사뿐 아니라 서양이 인삼과 심마니에 덧씌운 미개한 이미지의 기원을 살핀다. 18세기 후반 서양 의학계가 인삼의 유효 성분 추출에 실패하자 동양의 추출 기술에 열등감을 갖고 인삼의 약성을 폄하했다는 분석이다. 주 교수는 “치밀한 사료 연구를 바탕으로 세계사의 주변부에 놓였던 인삼을 세계의 중심에 놓았다. 인삼에 대한 서구 학계의 편향적 시각에 반격을 가한 수작”이라고 분석했다.
일국사(一國史) 관점을 넘어 세계사를 들여다봤다는 점에서 최근 세계 사학계의 추세와도 맞닿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세계화를 거치며 최근 전 세계 학계에서는 여러 국가와 문화를 넘나들며 국가 간 연결망을 들여다보는 세계사적 관점이 대두되고 있다”며 “이 책은 한국 인삼이 17세기 동아시아와 유럽 등으로 흘러들어가는 과정을 추적하며 지구적 관점을 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제국주의사 분야 세계 석학으로 알려진 존 맥켄지 영국 랭커스터대 명예교수는 추천사에 “한국의 한 식물인 인삼이 어떻게 서구 무역에 중심에 놓이게 됐는지를 추적하며 경제·문화·의학사로 주제가 확장된다. 인삼이라는 작은 틈새로 모든 종류의 분야를 조명해냈다”고 평했다. 인삼을 둘러싼 동서양의 무역사뿐만 아니라 동서양이 지적으로 교류한 본초학(本草學) 등 의학사까지 포괄해 학문적으로도 확장성을 지녔다는 평가다.
‘소비의 역사’ ‘그랜드 투어’ ‘지도 만드는 사람’을 비롯해 문화사, 미시사(微視史)에 천착해온 설 교수는 “동양 여성으로 서양사를 연구하면서 늘 소수자 감수성을 갖고 역사를 바라봤다”며 “앞으로도 서양사에서 가볍고 하찮다고 치부해왔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삶 깊숙한 곳에 녹아 들었던 작은 것들의 역사를 탐구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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