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말 동네 식당 입구에 삐뚤빼뚤 손 글씨로 쓰인 안내문 앞에서 소설가 조경란(53)은 발길을 멈춰 세웠다. 어째서 ‘개인 사정’이 아니라 ‘가정 사정’이라고 썼을까. 어쩌면 식당 주인에게 개인보다 더 큰 일이 벌어진 건 아닐까. 나보다 더 커서 나 홀로 감당하기 어려운 사정이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딛고 일어설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들이 이어졌다.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일부러 그 식당 앞을 지나갔다. 식당 문이 다시 열리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지만 식당은 끝내 다시 문을 열지 않았다.
“그 안내문이 계속 제 마음에 남아 있었어요.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상실의 아픔을 겪는 어떤 가정에 대한 이야기를 써내려가기 시작했죠.”
2018년 2월 시작한 글쓰기는 올해 3월 끝났다. 그는 14일 여덟 편의 연작소설을 엮은 신간 ‘가정 사정’(문학동네)을 펴냈다. 25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가족이라는 기둥을 지탱해주던 일부가 사라지고 남겨진 이들의 이야기”라며 “상실을 겪은 사람들을 이 세상에 홀로 내버려두고 싶지 않아서 그들 곁을 지켜주는 주변 인물들을 빚었다”고 말했다.
그가 가장 마지막까지 집필한 ‘개인 사정’은 어릴 적 자녀를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려던 부모에게서 살아남은 두 남매가 한 아이를 돌보는 이야기다. 백화점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인주는 알콜 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한 오빠의 부탁으로 일곱 살 규이를 돌보게 된다. 오빠와 함께 살던 아이 엄마마저 집을 떠나 집에 홀로 남겨진 규이를 먹이고 거두는 건 인주에게 분명 과분한 일이다. 하지만 인주는 홀로 남겨지는 아픔을 알기에 규이 곁을 지켜준다.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던 오빠의 말을 떠올리며.
“홀로 남겨진 사람은 상실이 한 인간을 얼마나 훼손시키는지 알고 있어요. 그 아픔을 알기에 아픈 사람은 아픈 사람을 버리지 않고 곁에 머무는 거죠. 누군가를 먹이고 거두는 것은 분명 고단한 일이지만 결국 그 일이 나를 살게 하고 지탱하는 힘이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표제작 ‘가정 사정’은 2017년 말 그의 마음에 남았던 안내 문구로 끝맺는다. 양장점을 운영하는 50대 여성 정미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어머니와 남동생을 잃고 아버지와 단 둘이 남겨진다. 가족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던 살가운 남동생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말없는 부녀 사이에는 적막만 흐른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필요한 순간 이들은 서로의 곁을 지킨다. 경비 근무를 서다 다리를 다친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정미는 양장점 문을 닫고 병원으로 향하며 안내문을 붙인다. ‘가정 사정으로 쉽니다.’ 그는 “생업을 접어두고 아버지에게 향하는 정미처럼, 당신에게도 당신 곁을 지켜줄 분명한 한 사람이 있다는 말을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다음 작품으로 ‘이웃 사정’을 쓰고 싶어졌어요. 여덟 번째 소설집을 쓰고 난 뒤에야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벗어나 이웃의 이야기를 쓸 수 있게 됐어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문 닫은 그 가게 주인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이제는 나보다 더 큰 이웃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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