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젊은이들에게 남은 마지막 숨통, 그가 달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8월 4일 13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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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기정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탄생 110주년 맞아 재출간


1936년 8월 9일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대회가 열린 스타디움. 마지막 100m를 남겨두고 열광하는 10만 관중의 함성이 울려퍼졌다. 2시간 20여분 전 이곳 스타디움 출발선 앞에 나란히 섰던 27개국 출신 마라토너 55명을 모두 제치고 24세 조선 청년 손기정이 나는 듯이 달려들어 결승 테이프를 가슴에 감았다. 결승 테이프를 끊은데 걸린 시간은 2시간 29분 19초 2. 올림픽신기록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시상대에 올라 금빛 메달을 목에 걸고 월계관을 쓰고도 그는 고개를 숙였다.

‘서서히 중앙 깃대를 올라가는 일장기, 그리고 귓속을 파고드는 기미가요.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결코 일본 사람일 수가 없다. 나는 일본을 위해 뛴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위해, 고통 받는 조선 동포를 위해 뛴 것이다.’


대한민국의 마라토너 손기정(1912~2002) 탄생 110주년을 맞아 그가 1983년 출간했던 자서전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휴머니스트)이 9일 다시 출간된다. 그가 마라토너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되기까지 일생을 담은 자서전은 1976년 1월 1일부터 29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그의 칼럼 23편과 이후 1984년까지 기록한 에세이를 엮었다. 앞서 2012년 탄생 100주년을 맞아 모교인 서울 양정고등학교동문회에서 한 차례 자서전을 재출간한 뒤 1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나왔다.

1912년 망국에서 태어난 손기정에게 달리기는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였다. 그는 자서전에 ‘운동이야말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남은 마지막 숨통이었다. 일본 사람들은 몸으로 뛰고 달리는 운동마저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조선의 젊은이가 운동을 통해 일본을 누르고 쾌재를 부르며 조선 민족의 생존을 자각하게 됐는지 그들은 깨닫지 못했다’고 썼다. 비록 일장기가 그려진 옷을 입고 뛰었지만 그는 세계 대회에서 마주한 팬들에게 ‘손긔졍’이라는 한글 이름과 함께 ‘KOREAN’이라는 국적을 명확히 새긴 사인을 선물하곤 했다.


하지만 나라를 잃은 그에게는 올림픽 우승을 기뻐할 기회조차 없었다. 일제가 축하행사를 일절 금지시킨 탓이다. 그를 위한 축하행사는 광복 후인 1945년 12월 27일에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다. 그는 4000여 명의 선수단을 이끌고 경기장에 들어선 순간을 떠올리며 ‘태극기를 든 손이 떨려왔다. 자랑스러운 태극기를 양손에 들고 일장기 아래 울분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오욕의 날을 떠올렸다’는 기록을 남겼다.

손기정의 이야기는 1984년 로스엔젤레스올림픽 폐회식에서 끝난다. 1988년 열릴 서울올림픽을 소개하는 대표자로 폐회식 무대에 선 그의 귓가에 “손기정, 코리아!”라는 함성이 울려퍼졌다. 1936년 마라토너로 베를린올림픽에 참여한 이래 초청연사로 여덟 차례 올림픽에 참석했지만 이렇게 많은 관중 앞에서 그의 국적이 불린 건 처음이었다. 그가 올림픽 금메달보다 더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 이뤄진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이것으로 비로소 나의 길고 긴 싸움은 끝났구나. 나라를 가진 민족은 행복하다. 조국 땅 위에서 구김살 없이 달릴 수 있는 젊은이들을 행복하다. 그들이 달리는 것을 누가 막겠는가.’

책에는 그와 영욕의 역사를 함께 한 동아일보와의 인연도 나온다. 1936년 8월 25일 동아일보는 베를린올림픽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오른 그의 가슴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웠다는 이유로 이듬해 6월까지 정간 처분을 받았다. 1946년 8월 17일에는 ‘그리스 정부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를 위해 기증하기로 한 고대 그리스 투구를 빼앗겼다’는 내용의 단독 보도를 통해 훗날 투구를 되찾을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그리스 정부가 브리디니 신문사를 통해 손기정에게 그리스 투구를 선물하기로 했으나, 일제가 이 사실을 선수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독일 베를린 살로텐부르크 박물관이 소장하던 유물은 베를린올림픽 개최 50주년을 맞은 1986년 마침내 그의 품에 돌아온다. 손기정은 “이 투구는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것”이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고, 이 투구는 1987년 서구 유물 최초로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됐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받은 월계관, 그리스 투구(사진).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하고 받은 월계관, 그리스 투구(사진). 국립대구박물관 제공


손기정의 기록은 1984년 멈췄지만, 그의 이야기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다. 손기정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55)은 이 책에 1985년부터 2002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고인의 이야기를 채웠다.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그가 금 모으기 운동 공익광고 캠페인에 출연하며 “출연료를 단 한 푼도 받지 않는다는 전제로 출연하겠다”고 약속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사무총장은 “할아버지는 나라가 어려울 때마다 가장 선두에서 달려온 분”이라고 회상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기억하게 해 달라’는 유언을 제게 남겼어요. 어쩌면 이 유언은 ‘코리아’라는 세 글자가 너무도 당연해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남긴 당부가 아니었을까요. 코리아라는 이름을 되찾기 위해 달려왔던 이들이 있었음을 기억해달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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