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의 어느 날, 지방 도시에 사는 중년 여성 순례는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온다. 직장 생활하는 딸의 집에 하룻밤 머물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과 달리 결혼도, 아이 생각도 없다는 딸을 묵묵히 바라본다. 일을 많이 시키는 직장은 다니지 않겠다며 자신이 원하는 길을 단호하게 걸어가는 딸의 태도를 존중한다. 그렇다고 순례가 남편과 결혼했다 이혼한 자기 삶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순례는 지금 연인과 현실적인 이유로 동거를 망설이지만, 연인과 미래를 꿈꿀 수 있는지도 담담하게 고민한다. 단편소설 ‘승객’의 이야기다.
최근 5번째 소설집 ‘굿바이 R’(문학동네)을 펴낸 전경린 작가(60·사진)는 드라마에서 볼 법한 중년 여성의 전형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그린다. 소설 속 중년 여성들은 저녁마다 가족을 위해 과일을 깎아주며 행복해하는 가정주부도, 기업에서 인정받는 커리어우먼도 아니지만 자신의 인생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전 작가는 2일 전화 인터뷰에서 “전형적인 삶을 답습하는 중년 여성들보단 홀로 자기 길을 가며 삶의 현재를 생성해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궁금했다”고 했다.
“미혼, 이혼, 비혼 등 다양한 이유로 혼자 사는 여성 인구가 늘고 있어요. 비주류였던 1인 가구가 주류가 되고 있죠. 이혼하거나 가족을 떠나보낸 중년 여성의 모습을 그린 것도 이 때문입니다. 중년 여성들이 자식 잘되는 것만으로 진짜 만족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지 궁금했죠.”
19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에 당선돼 등단한 전경린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섬세하고 정확하게 포착한 작가로 불려왔다. 하지만 이번 소설집에 담긴 7편의 중·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중년 여성들에게 사랑은 우선순위가 아니다. 이별은 가방을 들고 건너편 플랫폼으로 가서 환승하듯 익숙해졌고(단편 ‘붓꽃’), 여행지에서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중편 ‘굿바이 R’). 그는 “이번 소설집에선 사랑의 순위가 뒤로 밀렸다. 독립적이고 개인적인 여성의 모습을 그리려 했다”고 말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겪는 현실은 만만치 않다. 잡지사에서 근무하는 탓에 인터뷰하기 위해 지방을 떠돌아야 하고(단편 ‘사구미 해변’), 좀처럼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기간제 교사의 삶은 불안하다(단편 ‘합’). 소설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이들이, 현실과는 다른 환상이 돼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는 평생 글을 써서 돈을 벌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제가 진 짐이고 현실이었죠. 일이라는 짐을 감당하며 사는 건 저뿐만이 아니죠. 그래서 소설 주인공도 짐을 지고 움직이는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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