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사이드 아웃’에는 ‘추상화 사고(Abstract thought)’라는 공간이 나옵니다. 주인공 캐릭터들은 이 공간을 통과할 때 먼저 입체 도형으로 단순화된 뒤 분열과 해체를 거쳐 평면 도형이 되고, 밋밋한 무늬로까지 변합니다. 곤란해 빠진 주인공들은 이 단순화 과정을 역으로 이용해 선으로 변신한 뒤 좁은 문을 탈출하죠. 만약 탈출이 더 늦어졌다면? 아마 다음 단계로 점으로 변했을테죠.
추상화(抽象化·abstraction)는 핵심적인 개념을 간추려 추출해 내는 과정이죠. ‘오컴의 면도날’로 덜 중요한 것을 제거하고 깎아냅니다. 현상과 상황을 관찰해 일반적 원리로 설명해야 하는 지적 활동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자 시작입니다. 그렇게 핵심만 뽑아내다 보면 결국 점과 선만 남습니다. 몬드리안의 그림 ‘나무’ 연작(아래)은 추상화의 과정을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죠.
▽점→선→방향→연결
징검다리는 가장 ‘추상적’인 건축물입니다. 건축물 중 가장 단순한 구조입니다. 몬드리안의 그림 같습니다. 돌 하나하나가 따로 있지만 전체로 보면 이어져 있습니다. 점이 연결돼 선으로 이어져 있죠. 점과 선은 공간과 평면을 위한 가장 기본 구성입니다. 이 점과 선들은 목적(쓰임새)이 명확하니 방향도 정해져 있습니다. 하천을 건너게 해준다는 본래의 쓸모가 있으니까요. 점이 선이 되고 선이 방향을 제시하며 공간을 연결해 사람들을 잇습니다.
징검다리는 정체된 공간이지만, 사람이 방향을 잡아 건너게 되면 시간의 지배를 받습니다. 강을 건너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시공간의 세계로 확장됩니다.
▽점→선→방향→연결→사건(시공간)
징검다리의 점과 선에는 ‘사건의 연속’과 ‘방향’이 있습니다. 방향은 관성이 있으니 미래로 이어지겠죠? 즉 예측이 가능해집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사건의 연속입니다. 사건 하나를 치르며 해결하고 나면, 그 사건은 훗날 경험과 기억의 ‘점’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곰곰이 돌이켜보면 그 점들이 서로 이어져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곤 합니다. 모든 사건이 개별적인 점으로 보였지만 나중에 관찰하고 해석해보니, 방향성이 있는 ‘선’으로 연결돼 있었던 것이죠. 아무 상관없이 단절됐던 경험들이 굴비두름처럼 엮여있었음을 뒤늦게 깨닫습니다. 그리고 현재 그 선들이 이어진 끝 점에 내 자신이 서 있고요. 그런데 또 가야 합니다. 어디로 가죠?
오늘도 우리는 닥친 일들을 하나하나 처리하고 해결합니다.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들에 우선순위를 정해 순서대로 해도 늘 허덕이죠.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리고는 저녁엔 일기를 쓰며 오늘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정리한 뒤 기억으로 남기려 하겠죠. 하지만 어제 일들과 내일 벌어질 일들을 함께 선으로 연결해 보면?
▽점→선→방향→연결→사건(시공간)→해석→분석→예측
지나온 점들을 분석·해석하고 종합하는 이유는 미래를 예측하기 위함입니다. 분명히 어디론가 가고 있기 때문이죠. 그 방향을 알기 위해, 방향의 방향을 예측하고 싶어 점들을 이어봅니다. 공간을 시간으로 해석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대입합니다.
‘이공계’에선 가설을 세우고 증명하며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냅니다. ‘문과’는 좀 다른 방식입니다. 이미 벌어진 ‘사건’을 해석·분석해 패턴을 찾아내고 그것으로 미래를 예측합니다. 예측이 맞다면 패턴은 사실로 입증되고 신빙성 높은 이론으로 정립되겠지요. 역사를 주밀하게 공부하는 이유입니다. 예측을 하기 위해 분석을 하고, 예측이 맞다면 분석이 사실로 입증되는 것이지요.
심지어 예측은 돈과 권력까지 주기도 합니다. 날씨, 주식, 원자재, 정치, 하물며 스포츠 토토에 경마까지…. 예측에 대한 욕망은 과욕일까요 생존 본능일까요?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일까요?
오늘도 우리는 징검다리 하나하나를 폴짝폴짝 건넙니다. 그냥 무턱대고 가기만 할 때가 많죠. 하지만 방향과 속도를 스스로 조절할 수 있다면 강 건너편도 가늠할 수 있겠죠. 이 운명의 키를 쥐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밤을 새가며 점을 분석하고 선을 해석하며 방향의 방향을 가늠하려 몸부림칩니다.
▽징검다리는 자연이나 사람들의 사회에서 생기는 ‘사건’들이 벌어지고 발전하는 방향을 상징하는 건축물 같아 흥미롭습니다. 점과 선 외에도 다른 요소들이 꽤 의미있게 끼어들기 때문이죠.
징검다리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수면 바로 위를 걷기 때문이죠. 점(돌)과 점 사이를 흐르는 물살을 보면서 넘습니다. 이 시공간의 건축물에 물살이 주요 소재로 끼어듭니다. 물살도 추상화해보면 아마 꽤나 요란한 소리만 남겠죠? 청각을 동원해야 제대로 느껴집니다.
한 점에서 다른 점으로 넘을 때에는 균형을 잘 잡아야 합니다. 걸음 폭을 계산하면서 움직여야죠. 아이들과 강아지들이 징검다리 앞에서 멈칫멈칫 하는 이유입니다. 크기(몸무게)와 방향, 속도가 동원되니 수학·물리학의 ‘벡터’도 숟가락 하나를 얹습니다.
징검다리는 오락가락합니다. 있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납니다. 비가 많이 와 물이 불면 잠기니까요. 그러다 물이 빠지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죠. 인공 구조물이 맞나요? 존재가 출몰을 거듭합니다. 자연의 일부라고 여겨도 그만입니다. 매우 가변적인 건축입니다. 노자 장자의 ‘무위자연’도 생각나게 해줍니다.
징검다리의 최대 장점은 건널 때 무념무상에 빠지게 해 준다는 것 같습니다. 행여 물에 퐁당 빠질까 살짝 긴장하느라 다른 생각이 안 나니까요. 최고의 뇌 휴식이라는 ‘멍 때리기’도 좋습니다. 여름이 더 가기 전 징검다리를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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