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중순 기자 앞으로 한 권의 책이 배송됐다. 흰색 표지의 가제본이었다. 표지엔 제목 ‘딜리터: 사라지게 해드립니다’와 출판사 ‘자이언트북스’만 써 있었다. 책날개를 펼쳐도 누가 저자인지, 어떤 작품인지 설명조차 없었다. 책을 열었다가 홀린 듯 빠져 읽기 시작했다. 누가 쓴 책일까 궁금증이 치밀었다.
추리를 시작했다. 먼저 자이언트북스가 작가 매니지먼트 업체 블러썸크리에이티브가 운영하는 출판사라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김영하, 김중혁, 박상영, 김금희, 배명훈, 편혜영 등 블러썸크리에이티브 소속 작가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짜임새 있는 구조, 흡인력 높은 문장을 보면 신인 작가는 아닌 듯했다. 문득 최근 장편소설을 완성했다던 한 중견 작가가 생각났다.
황예인 자이언트북스 편집장에게 물었더니 “작가 이름은 절대 알려줄 수 없다”는 단호한 답이 돌아왔다. 가제본은 주요 출판사 문학 편집자, 문학 담당 기자, 사전 신청한 독자 200명에게 배포했는데 작가 이름을 맞추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황 편집장은 “사람이나 물건을 사라지게 만드는 흑마술사 ‘딜리터’가 소설 주인공이라는 이유로 ‘저자가 마술사 아니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다”며 “작가가 기존에 쓰던 작품과 결이 다른 소설을 쓴 점에 착안해 이름을 가리고 ‘블라인드 테스트’처럼 가제본을 만들었다”고 했다.
최근 출판사들이 책을 출간하기 전 작가의 이름을 가린 ‘블라인드 가제본’을 펴낸 뒤 사전 신청한 독자들에게 배포하는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작가에 대한 선입견을 없애기 위한 노력이다.
창비는 올 1월 이현 작가의 장편소설 ‘호수의 일’, 올 5월 단요 작가의 장편소설 ‘다이브’를 블라인드 가제본으로 배포했다. 독자들이 작가의 이름을 궁금해 하는 글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자발적으로 올린 덕에 ‘바이럴 마케팅’이 됐다. 두 책 모두 출간 직후 소설 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출판사는 ‘블라인드 가제본’을 통해 인지도가 낮거나 신인 작가의 작품을 알릴 수 있다”며 “독자도 편견 없이 작품을 음미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출판사 쌤앤파커스는 지난달 20일 신인 작가 김남윤의 장편소설 ‘철수 삼촌’을 출간하기 전 작가의 이름을 알리지 않고 독자 서평단을 선정했다. 책 자체를 블라인드 가제본으로 만들지 않더라도 미리 책을 읽어보려는 이들에게 선입견을 심어주지 않기 위한 것. 김명래 쌤앤파커스 디지털콘텐츠팀장은 “특정 작가의 충성 독자보단 재밌는 콘텐츠면 어떤 것이든 소비하려는 2030세대 독자의 반응이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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