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당한 나비의 영혼은 한 덩어리 화염이 되어 보덴호숫가의 하늘로 사라졌다. 7월 20일 개막해 이달 21일까지 무대에 오르는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페스티벌의 푸치니 ‘나비부인’(2022, 2023년 공연)은 행복과 절망을 오가는 여인의 심리를 미니멀리즘적 무대와 시시각각 변하는 조명으로 형상화했다.
11일(현지시간) 저녁. 보덴 호수 위에는 말았다가 편 듯 주름진 한 장의 거대한 종이 모양 조형물이 이곳을 찾은 이들을 맞이했다. 어둠이 짙어지는 호숫가 저편에서 여객선이 도착하고 관객들이 자리를 잡자 음산한 전주와 함께 공연이 시작됐다. 동양의 산수화가 그려진 ‘종이’는 가수들이 연기를 펼치는 무대가 되었다.
미국 영사가 언덕을 걸어 올라오는 첫 장면에서 밝은 햇살을 표현한 조명은 1막 결혼식 장면 중 신부 초초상(나비부인)이 친구들과 함께 언덕을 넘어 다가오자 붉은 노을의 색감으로 변했다. 이후 무대의 색은 장면과 음악의 분위기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했다. 지금까지의 브레겐츠 페스티벌 무대와 사뭇 달랐다.
2017~2018년 공연된 비제 ‘카르멘’은 무대 양쪽의 손이 흩뿌린 16장의 카드 모양 조형물과 조각조각 나눠진 평면 무대가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했었다. 2019, 2021년의 베르디 ‘리골레토’는 무대 위의 거대한 광대 머리와 기구(氣球) 모양 조형물 위에서 출연자들이 서커스를 펼치듯 역동적인 무대를 선보였다. 이와 달리 올해 ‘나비부인’은 종이 무대 위에 표현된 산수화가 상징하듯 여백의 미감이 두드러졌다. 종이모양 무대 외의 장치란 ‘종이’를 뚫고 폭력적으로 솟아오르는 성조기와 무대 뒤를 돌아 다가오는 ‘종이배’가 전부였다.
과거 화려한 브레겐츠 페스티벌 무대에 익숙한 관객들이 자칫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까. 지난달 31일 국내 복합상영관에서 중계한 브레겐츠발 ‘나비부인’ 영상을 보았을 때는 걱정이 들었다. 그러나 카메라가 쉴 새 없이 인물을 쫓아다니는 영상물과 달리 두 눈만으로 접한 무대는 실제 산수와 같은 장엄함이 있었다. 가수들의 움직임이 더 설득력 있게 눈에 들어왔다. 계속 변하는 조명도 영화관에서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다양한 분위기의 색감을 전했다.
연출가 안드레아 호모키는 원작에 없는 인물들을 무대 위에 등장시켰다. 무용단이 흰 옷을 입고 절제된 동작으로 연기하는 ‘혼령’들이었다. 푸치니 첫 오페라 ‘빌리’의 귀신들이나 일본 애니메이션 속의 정령들을 연상시켰고 분위기 전달에 나름 효과적이었다.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었다. 나비부인의 아이는 일본 전통 축제 의상을 입고 등장했다. 일본의 종교와 법률, 풍습을 조롱한 실제 나비부인은 서양 옷을 구해 아이에게 입혔을 것이다. 2막 간주곡 직후에는 푸치니가 연극 ‘나비부인’을 오페라로 만드는 동기가 된 해돋이 장면이 나오는데 불과 3분 남짓한 이 장면이 공연에서 생략됐다. 이유에 대해 설명이라도 듣고 싶었다.
브레겐츠 페스티벌 메인 공연은 주요 배역마다 세 성악가가 번갈아 출연한다. 이날 주연을 맡은 아일랜드 소프라노 셀린 번과 조지아 테너 오타르 조르지키아는 서로 어울린다 싶을 정도의 졸연(拙演)을 펼쳤다. 마이크를 이용한 믹싱 음향인데도 최고음의 클라이맥스가 관현악의 반주를 뚫고 나오지 못했다. 아예 마이크에 의존해 성악 발성을 포기했다 싶은 순간들도 느껴졌다. 27세의 대만 여성 지휘자 린이첸은 튀는 점 없이 무난하게 전곡을 이끌어 앞으로의 발전에 기대를 갖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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