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제 정신이냐”고 했다. 친구들은 “너 정말 별종이다”라며 혀를 내둘렀다. 예술의전당 영재아카데미, 예원학교, 서울예고로 이어지는 클래식 엘리트 코스를 밟은 정지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28·여)가 독일 드레스덴 국립음대를 1년 다닌 뒤 한국에 돌아와 돌연 자퇴를 선언했을 때 주변 반응이었다. 유년시절 일본 오사카 국제 음악 콩쿠르 2위, 서울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피아노 콩쿠르 1위, 한음 콩쿠르 1위 등 출전하는 대회마다 상을 휩쓴 클래식 유망주의 ‘파격 선언’이었다.
●재즈 뮤지션으로 전향한 클래식 학도
16일 오전 서울 마포구 CJ아지트에서 만난 정 씨는 “저도 (조)성진이처럼 될 줄 알았다”며 웃었다. 그는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예원학교 동기다.
“클래식 피아니스트의 가장 큰 숙제는 쇼팽, 베토벤, 라흐마니노프 등 거장의 곡을 완벽히 쳐 내는 거에요. 그런데 저는 악보에서 다른 게 보였어요. 내 색깔과 개성을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가 고등학교 때 폭발했죠. 대학 진학 후 독일에서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 내면의 소리를 들었고, 나 자신을 마주하게 됐어요.”
드레스덴대를 자퇴한 그는 미국 버클리 음대에 진학해 재즈피아노와 재즈작곡을 전공했다. 이후 CJ문화재단(이사장 이재현)의 장학프로그램 장학생으로 선발돼 미국 맨해튼 음대 재즈 작곡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
“클래식 음악가 정지수도 나의 일부가 돼 버렸다”는 그의 말처럼 재즈를 새롭게 익히는 것은 쉽지 않았다. 재즈와 클래식은 아티스트의 호흡이나 표현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 클래식은 정확한 주법과 매끄러운 화성진행이 중요한 반면, 재즈는 즉흥성과 박자감이 더 중요하다. 현존하는 최고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도 재즈와 클래식을 둘 다 연주하는 콘서트를 열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건 불가능하다. 두 장르가 필요로 하는 두뇌 회로가 다르다”고 답하기도 했다.
“재즈의 언어를 체화하려고 노력했어요. 재즈 아티스트의 솔로 음원을 노래로도 불러보고, 음들을 그대로 카피해 전부 다 외우기도 했어요. 예를 들어 재즈 피아니스트 빌 에반스나 브래드 멜다우의 즉흥연주 구간을 악보에 음표로 받아 적은 뒤 다 외우고, 음원을 틀어 놓고 똑같이 치는 거죠.”
●한국인 최초 브리지 작곡 콩쿠르 우승
‘사용하는 뇌가 다르다’고 할 정도로 판이한 장르로의 전향. 이는 일면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지만 조금씩 성과가 나오고 있다. 그는 올해 6월 북아메리카 지역의 가장 오래된 음악축제 라비니아 페스티벌(Ravinia Festival)이 주최하는 제4회 브리지 작곡 콩쿠르(Bridges Composition Competition)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을 거뒀다. 주최 측은 축제의 메인 장르인 재즈와 클래식을 융합한 작곡으로 대회를 개최했다. 최초의 클래식과 재즈 퓨전 장르 콩쿠르다. 그가 작곡한 ‘Moment to Journey’는 바이올린과 첼로, 비올라가 포함된 클래식 현악4중주와 재즈트리오(피아노와 베이스, 드럼), 트럼펫 연주가 들어간 크로스오버 곡이다. “재즈로 전향은 했지만 클래식 아티스트로 지낸 15년이 사라지진 않더군요. 재즈와 클래식 아티스트의 정체성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가 브리지 콩쿠르 우승자의 연주를 라비니아 페스티벌에서 보게 됐어요. ‘나도 클래식과 재즈 둘 다 하면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그 때 처음 했고, 대회에까지 나가게 됐죠.”
재즈 뮤지션으로는 처음으로 19일 CJ아지트에서 단독 공연도 연다. 이 역시 CJ문화재단 장학프로그램의 일환. 7곡의 연주곡은 그의 음악적 여정을 반영한다. 첫 두 곡은 클래식 학도 정지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바흐와 쇼팽의 곡. 이후 5곡은 정 씨가 작곡한 곡이다. 클래식 피아니스트에서 재즈 뮤지션으로 전향한 그의 삶의 궤적처럼 뒤로 갈수록 점점 재즈 색채가 짙어지도록 곡의 순서를 정했다는 게 그의 설명. 두 장르의 크로스오버 곡을 선보이는 만큼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플룻, 색소폰, 베이스, 드럼 연주자가 한 자리에 모인다.
●“획일화된 한국 클래식 교육 바꾸고 싶다”
끓어오르는 창작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클래식 학도에서 재즈 뮤지션으로 변모했듯,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새로운 음악적 영감이 넘친다. “한국인만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건 국악”이라는 그는 재즈와 국악의 융합에도 도전했다. 버클리 음대에서 알게 된 장구 연주자와 듀오를 결성해 피아노와 장구 듀오 앨범 ‘Hi, We are Jihye & Jisu’도 지난해 발매했다. 한국적 요소를 가미한 재즈를 통해 K팝, K클래식에 이은 K재즈 열풍도 꿈꾼다.
“예원학교와 서울예고를 다니면서 우리나라 음악교육의 현실에 답답함을 많이 느꼈어요. 모두 서울대라는 목표를 향해 똑같이 연주해야 하죠. 각자 표현하고 싶은 것이 억압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시스템을 깨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클래식 외의 타 장르도 시도하면서 열린 시야를 갖게 된 만큼 계속해서 새로운 장르의 융합을 시도하고, 이를 후학에게 전해주는 역할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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