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문턱에 막 들어선 것과 달리 극장가에는 겨울 냉기가 돌고 있다. 극장가 최대 성수기인 여름 시장에 ‘빅4’로 불리는 한국영화 대작 4편이 개봉했지만 흥행 성적이 기대에 못 미치면서 분위기가 얼어붙은 것. 예상을 밑도는 성적표를 받아든 주요 배급사들은 팬데믹 기간 창고에 쌓아둔 대작들의 개봉일을 잡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다.
25일 현재 가을 시장 개봉을 확정한 순제작비 100억 원 이상의 대작은 ‘공조2: 인터내셔날(9월 7일)’이 전부. 이 외에는 ‘정직한 후보2’ ‘인생은 아름다워’(이상 9월 28일) 등 중소규모 영화들만 개봉을 확정했다. 영화팬들 사이에서는 “가을 극장가에 한국영화 씨가 말랐다”는 말까지 나온다.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 ‘헌트’ ‘비상선언’ ‘외계+인’ 등 ‘빅4’ 한국영화 중 25일 현재까지 손익분기점을 넘긴 영화는 682만 명을 모은 ‘한산’이 유일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기대치에는 못 미친다. ‘한산’은 전작 ‘명량’이 박스오피스 사상 가장 많은 관객인 1760만여 명을 모았고, 개봉 초기 호평이 쏟아지면서 ‘1000만 예약 영화’라는 평가가 나왔지만 결과는 예상을 밑돌았다. ‘한산’은 29일부터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쿠팡플레이에서도 공개될 예정이다. 이로인해 최종 관객 수는 700만 명가량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남아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감염 공포와 폭우, 비싼 관람료 탓에 ‘빅4’ 중 한 두 편 정도만 엄선해 관람하는 분위기가 확산된 점 등은 여름시장 흥행 부진 원인으로 꼽힌다.
‘빅4’로 분위기를 띄운 다음 가을부터 쌓인 대작들을 하나 둘 풀어내려던 영화 배급사들은 난감해하고 있다. 한 영화 배급사 관계자는 “비싼 관람료에 따른 반발 심리인지 관객들이 어느 때보다 냉철해지고 빈틈이 보이는 영화에 대한 혹평 수위가 가혹한 수준으로 높아지면서 수작급 영화가 아닌 이상 개봉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또 다른 배급사 관계자는 “‘빅4’ 중 하나라도 잭팟을 터뜨렸다면 자신감을 가지고 가을 개봉을 결정할 텐데 ‘한산’마저 애매한 성적을 거두면서 배급사 대부분이 자신감을 잃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롯데엔터테인먼트가 추석 연휴 극장가에 신작 대작 대신 이례적으로 지난해 개봉한 ‘모가디슈’를 재개봉하기로 한 것도 여름시장 대작 정면대결의 결과가 ‘관객 나눠먹기’와 출혈 경쟁으로 이어진 것과 무관치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현재 CJ ENM, 롯데엔터테인먼트 등 각 배급사에는 개봉하지 못한 영화가 쌓여있다. 대표적인 영화가 안중근 의사를 주인공으로 한 윤제균 감독의 뮤지컬 영화 ‘영웅’이다. 2019년 말 촬영을 끝냈지만 팬데믹 여파에 이어 여름시장 대작 흥행 부진이 이어지면서 연말쯤에야 개봉할 것으로 보인다. 우주인 이야기를 다룬 김용화 감독의 영화 ‘더 문’, 강제규 감독의 복귀작 ‘보스턴 1947’ 등은 언제 빛을 볼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대작 4편의 경쟁 과열이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들의 피로도를 높인 만큼 당분간 대작 개봉은 쉽지 않을 것”이라며 “대작 적체가 해소되지 않으면 신작 제작이 계속 밀리면서 한국영화산업이 전반적으로 침체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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