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80대 화가들 잇따라 개인전
송번수, 성좌에 별처럼 가시 박아… ‘금속 작품’ 엄태정 “쇠는 그저 쇠”
이건용, 선 통해 생태 혼란 성찰… 20점 안팎 작품에 오랜 공력 담아
그들이 빚은 작품에선 잘 익은 가을 술 냄새가 났다.
이젠 밤이면 살짝 선선한 기운도 감도는 늦여름. 미술 갤러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노장들의 진득한 성찬을 차려냈다. 23일 섬유공예가 송번수 작가(79)를 시작으로, 24일 추상조각가 엄태정 작가(84)와 25일 실험미술가 이건용 작가(80)의 개인전이 막을 올렸다.
성향이 다른 작가들이나 전시는 공통분모가 상당하다. 일단 작품 수가 조촐하다. 대략 20점 안팎. 하지만 전시장이 그득한 듯 하나하나 묵직하다. 초기작은 곰삭은 맛이 우러났고, 최신작은 켜켜이 쌓인 공력이 옹골찼다. 오랜 길을 걸었으되 군더더기 없는 간명함도 닮았다. 갖은 감상은 관객 몫으로 남겨둔 채 노장들은 묵묵히 결과를 내놓았다.
꽃이나 나무 가시를 주 소재로 삼아 ‘가시화가’로도 불리는 송번수 작가의 작품은 그래서 빛이 났다. 1970년대 프랑스 파리 유학 전후부터 모티브로 삼은 가시는 신작도 마찬가지. 허나 작가는 그저 “작은 가시는 고난과 시련, 큰 가시는 도전과 성취”라 일러줄 뿐. 꽃을 떼어낸 이유도, 가시 그림자를 그리는 까닭도 “콤퍼지션(composition·구성)”이라고만 했다. 송 작가가 여러 작품 제목에 ‘possibility(가능성)’를 붙이는 것도 이런 열린 해석을 기대하기 때문일까.
눈에 띄는 건 2022년 작 ‘Possibility-Constellation 022-Ⅱ’. 제목대로 성좌(constellation)에다 시그니처인 가시를 별처럼 박아 넣었다. 해설이 더 걸작이다. 심오한 우주를 화폭에 담고선 “외딴 작업실이라 별이 밝아 보여서”란다. 서울 용산구 ‘갤러리바톤’에서 열린 이번 전시 문패는 ‘Know Yourself’. 송 작가는 “누구나 남 탓하기 쉽지만 세상만사는 자신이 문제”라며 “소크라테스 명제는 여전히 모두의 숙제”라 했다. 다음 달 24일까지.
엄태정 작가의 개인전 ‘은빛 날개의 꿈과 기쁨’은 한발 더 나아간다. 대부분 금속 소재인 작품들은 건물을 세울 때부터 있어 왔던 듯 자리를 지키고 섰다. 전시가 열리는 종로구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는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1971년 지은 옛 ‘공간’ 사옥. 엄 작가는 고인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선생의 정신이 깃든 장소”라며 기뻐했다. 건물 바깥에 선보인 ‘기 No.3’는 같은 1971년에 만들었다 도난당했으나 지난해 새로 제작했다.
한국 추상조각의 1세대 주자로 꼽히는 그의 작품 역시 긴 설명이 필요치 않다. “쇠는 그저 쇠일 뿐.” 작가는 금속의 “본질적 물성(物性)”을 찾으려 했더니 그런 형태로 창조됐단다. “예술은 낯선 자(者)다.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마주하는 작업”이라니, 구도(求道)의 기운이 배어난다. 전시회 측은 이를 “고요하고 시(詩)적”이라 하나, 골짜기 계곡물처럼 활기차고 정겹기도 했다. 특히 표제작 ‘은빛 날개의…’는 1.5t이 넘어 다부진데도, 윙윙거리는 에어컨이 산바람이라도 되는 듯 경쾌함이 물씬했다. 내년 2월 26일까지.
종로구 ‘리안갤러리 서울’이 선사한 ‘Reborn’(재탄생)의 주인공 이건용 작가는 묵을수록 놀라운 특급 와인 같다. 1960년대 등단 때부터 “행위예술을 선도해왔다”는 평을 받은 그는 1976년 처음 선보인 연작 ‘보디스케이프(bodyscape)’를 이번 출품작에도 이어갔다. “신체적 ‘제약(制約)’을 이용해 선을 긋는다”는 뜻으로 당시엔 독재정권에 던지는 저항 메시지가 컸다.
작가는 이제 또 다른 제약에 주목한다. “생명에 조화로웠던 세상이 인간의 통제로 부조화해졌다”며 생태적 혼란을 성찰했다. 캠퍼스 위에서 북극곰이나 쓰레기 더미가 그의 선긋기에 얽히고설켜 한숨을 삼키고 있다. 최근 팬데믹을 겪으며 “환경과 관련해 반성했다”는 작가는 요즘 종이박스를 재활용해 작업한다고 한다. 10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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