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200년 전 ‘식물 이주’의 역사적 순간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3일 03시 00분


◇세계사를 바꾼 위대한 식물 상자/루크 키오 지음·정지호 옮김/408쪽·2만5000원·푸른숲

1829년 영국 런던. 호기심 많은 외과의사 너새니얼 워드의 집에서 인류의 역사를 바꿀 새싹이 고개를 내밀었다. 번데기가 나방이 되는 모습을 보려고 유리병 속에 마른 잎, 번데기, 흙을 넣어뒀는데 흙 표면 위로 새싹이 튼 것. 이 식물은 병 속에서 무려 3년을 살았다.

4년 뒤 워드는 양치류 등을 넣은 밀폐형 유리 상자를 호주 시드니까지 배에 실어 보냈다. 이후 호주 자생 식물 풀고사리 등을 같은 상자에 넣어 런던으로 보내는 실험도 진행했다. 두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식물을 살아있는 상태로 원거리를 이동시키는 일명 ‘워디언 케이스’가 발명된 순간이었다.

워디언 케이스는 식물을 종자 형태로 운반할 때 말라 죽거나 곰팡이가 피는 문제를 단번에 해결했다. 살아있는 식물을 그대로 운반하는 건 다른 대륙의 환경을 고스란히 이동시킨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워디언 케이스는 바닐라 후추 등 온갖 식물을 유럽으로 들여오는 ‘마법의 상자’로 대활약하며 종묘업계와 식물학자들에게 각광받았다.

그러나 19, 20세기 제국주의 열강들은 식민지에 플랜테이션(대규모 상업농장)을 조성하기 위한 도구로 이를 악용했다. 독일은 카카오를 포함한 각종 식물 묘목을 이 상자에 실어 카메룬 등 식민지로 대량 운송했다. 식민지의 넓은 농경지와 인부들을 활용해 각종 식물을 재배하며 천문학적인 수익을 거뒀다. 게다가 이 상자는 바이러스나 병충해까지 그대로 이동시켜 생태계 균형을 무너뜨리는 주범으로 지목받았다.

인간이 위디언 케이스로 식물을 자유롭게 운반한 결과를 빛과 그림자로 나눠 균형 있게 조명한 저자의 통찰력과 낯선 식물 상자 이야기를 쉽고 흥미롭게 풀어 쓴 솜씨가 돋보인다.

#식물이주#워디언케이스#대규모 상업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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