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갖고 있다. 그는 법조문을 비롯해 한번 읽은 모든 문서는 스캐너처럼 머릿 속에 저장하는 비상한 암기능력을 갖고 있다. 또한 가끔씩 상상 속에서 고래가 튀어나올 때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창조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우영우는 언어나 인지능력에는 문제가 없지만 사회적 관계와 상호작용에 어려움을 겪는다. 발달 장애인들 중에는 지적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 극소수는 천재성을 보인다. ‘고래’에 집착하는 우영우처럼 한가지 주제에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엄청난 정보를 수집하고, 천재적인 암기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너무 한정된 분야에만 관심을 갖다보니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거나 소통에는 어려움을 겪는다.
요즘 발달장애인들이 천재성을 발휘하는 분야 중 하나가 미술이다. 원래 미술치료는 발달장애인들이 자기표현과 의사소통력을 기르고, 신체의 근육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였다. 그런데 미술작업에 빠져든 발달장애 작가 중에는 정규 입시미술 교육을 받은 화가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화려한 색채감과 창조적인 작품을 쏟아내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다. ‘발달장애’는 언어, 인지, 운동, 사회성 등의 능력이 제 나이에 맞게 발달하지 못한 상태를 모두 지칭하는 말로, 자폐성 장애와 다운증후군, 지적장애 등을 모두 포괄하는 말이다.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한지민의 다운증후군 언니로 출연했던 정은혜 작가는 지난달 서울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드로잉 전시회를 가졌다. 실제 발달장애인인 그는 ‘은혜 씨의 포옹’이라는 그림에세이를 통해 자신이 꼭 안아주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을 그렸다. 지난달 31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개막한 전시회에는 발달·지체·청각 등의 장애를 안고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작가 50인의 작품이 선보이고 있다. 그런가하면 현재 전국 20개 러쉬 매장에서는 윈도를 갤러리로 활용해 발달장애 작가들의 그림을 만날 수 있는 ‘제1회 러쉬 아트페어’가 열리고 있다.
●마음을 그리는 화가
지난 8일 발달장애 미술박람회인 러쉬아트페어가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대학로 러쉬매장에서 만난 양예준 작가(13). 그는 흰 모자를 눌러쓴 채 인사를 하면서도 쉽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비늘이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멸종위기 샴 악어, 눈동자들이 가득찬 어린 왕자의 옷, 총천연색 색깔로 칠해진 ‘마음을 그리는 화가’ 자화상…. 오일 파스텔, 색연필,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 그린 그의 그림은 화려한 색채감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곳곳에 등장하는 눈동자가 섬뜩하면서도 아름답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였어요. 예준이가 혼잣말을 하면서 끊임없이 연필을 잡고 흔드는 반복행동을 했습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자극에 스스로 처리가 안되니까 불안해하면서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너무 안타까워서 벽에 커다란 전지를 붙여주었지요. 연필을 들고 그냥 흔들지 말고, 선이라도 그으리고 말이죠. 어느날 아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더군요. 지구 색연필을 잡고 반복해서 선을 그리고, 덧칠해서 번들번들해질 때까지 말이죠.”
어머니 장은경 씨는 예준이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에 빠졌다. 여러차례 자살충동도 겪었다고 했다. 연필을 쥐고 손을 흔드는 행동을 고치기 위해 시작한 그림 그리기로 우연하게 ‘미술 치료’가 시작됐다.
“어느날 얼굴 그림에 민트색을 칠해놨더라구요. 왜 이런 색을 칠하지? 다른 애들처럼 제대로 색을 그리지 못하는 걸 보고 걱정하면서도 그냥 놔뒀어요. 부모 모두 미술전공자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그런데 어느날 서대문 자연사박물관에서 주최하는 그림대회에 엄마 아빠하고 김밥싸고 가서 놀러가자는 마음에 신청해서 갔습니다. 아이가 입상하지 못했는데도, 전시를 하게 해주었어요. 그게 계기가 됐습니다. 이후 2년 동안 그림대회에 나가서 50여 개의 상을 받았습니다. 심사위원분들이 정형화된 그림이 아니라는 점에 대해 응원을 많이 해주셨어요.”
예준이는 밀알복지재단과 한양대에서 발달장애 미술 수업을 받기도 했다. 집에 와서도 4시간 이상씩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엄마가 “12시니까 자야 해”라고 말하면, “더 그리면 안돼요?”라고 묻는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너무 행복해하고, 자존감이 크게 높아지면서 치유가 되고 있다고 한다. 더 이상 약물이 필요없을 정도로 혼잣말을 하거나 손을 떠는 행동도 많이 나아졌다. 교실에서도 더 이상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에서도 장애인이 아니라 ‘그림 잘 그리는 아이’로 불려지게 됐다고 한다.
양예준 작가는 시내버스 광고도 나오고, 오티즘 엑스포, 러쉬아트페어에도 초대받는 어엿한 작가가 됐다. 지난 9월1일~6일 영국 사치(Saatchi) 갤러리가 주최하는 ‘스타트 아트페어 서울 2022’에도 학생 미술공모전에서 당선됐다. 발달장애 미술이 아니라 전국의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에서 심사를 거쳐 6명 중 한 명으로 당선된 것이다. 스타트 아트페어에는 기안84, 송민호, 낸시랭 등 유명 연예인들의 작품도 초청돼 화제를 모았다. 양 작가의 ‘우리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는 오랑우탄’ 그림은 10월 영국 런던 프리즈 위크 기간 사치 갤러리에서 열리는 ‘스타트 아트페어’에도 초청돼 글로벌 무대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예준이는 평소 눈동자를 그리기 좋아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주제로 한 작품에서도 눈동자에 슬픔을 담았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상징하는 해바라기와 사람의 이미지, 전쟁을 멈춰달라는 메세지와 함께 총알을 맞은 흔적도 그려넣었다. 어머니 장은경 씨에게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았던 소감을 물었다.
“우영우 그 친구는 매우 특별하잖아요. 그런 친구들은 자폐 스펙트럼 장애아이 중에 극소수입니다. 저도 장애아의 엄마니까. 제 아이가 우영우처럼 극소수의 재능을 가진 아이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제가 발달장애인들의 삶과 죽음에 관한 책 출판 작업을 함께 한 적이 있어요. 내 아이도 언젠가 엄마가 없는 세상에서, 어느 시설에 들어가서 살 수 밖에 없을 때가 오겠죠. 그 때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 있고, 자기만의 취미가 있다면 그거면 됐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특별하고 대단한 것을 바라지는 않아요. 그저 아이가 일반인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가고, 장애를 가졌지만 행복한 상태가 됐으면 합니다. 예준이에게 넌 어떤 화가야?하고 물어보면, ‘저는 마음을 그려요. 마음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어요’라고 말합니다. 그래 너는 네 마음을 그리니까, 사람들이 언젠가 그 마음을 알아줄꺼야라고 말해줍니다.”
●“이규재는 꼴찌다, 그러나 나는 화가지!”
발달장애 미술의 특징은 ‘교육’에 의해 미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집요하게 그림을 파고 들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법과 색채감을 완성해나간다는 점이다. 입시미술에 길들여진 천편일률적인 작품과 달리, 나이 어린 작가인데도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이고 대담한 작품이 많다. 10년 이상 발달장애 미술 작가를 발굴하고 전시와 협업을 기획해 온 크리에이터 한젬마 씨에게 발달장애 미술에 대해 물었다.
“작가들의 색감이 매우 자신있고, 밝은 경우가 많다. 색의 대비 매칭력이 뛰어나서 색감표현력이 강렬하고 구성력이 뛰어나다. 미술전시 브로슈어를 만들 때는 보통 색보정을 좀 한다. 좀더 밝고 선명하고, 강렬해 보이기 위해서다. 그런데 발달장애 작가들의 그림은 유독 원화만큼 색보정이 안됐다. 절대 그래픽이나 인쇄를 통해서는 그 원화만큼의 색상을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는 이들의 그림을 ‘빛’에 가깝다고 표현한다.”
발달장애 작가들은 시계, 자동차, 새 등 자신이 관심이 있는 대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끊임없이 반복해서 그린다. 9월19일까지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리고 있는 ‘장애인 문화 예술축제 A+ 페스티벌 특별전시’에는 부산시 연제구에 사는 발달장애 작가 윤진석 씨(24)의 작품도 전시되고 있다.
네살 때 발달장애 진단을 받은 그는 시계에 집착해왔다. 다른 사람 얼굴을 쳐다보거나 눈을 맞추는 것도 힘들어하는 윤 씨는, 병원과 식당, 복지관, 학교의 벽에는 걸려 있는 벽시계를 하염없이 쳐다보곤 했다고 한다. 어릴 적부터 벽에 걸린 시계를 앞면과 뒷면을 샅샅이 살피고, 시계를 분해해 내부를 관찰하는 것도 좋아했다. 그의 어머니는 “진석이는 다른 사람의 눈을 쳐다보는 대신 시계를 바라보며 위안을 얻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윤씨는 이렇게 관찰한 시계를 스케치북에 옮겼다. 종이 앞장에 시계 앞면을 그리고 뒷면에는 직접 관찰한 뒷모습을 새겨넣었다. 그는 해당 시계를 관찰한 장소와 시간까지도 정확히 기억했다. 그림 제목에는 늘 ‘그랜드호텔 수영장 시계’ ‘청도 오리백숙 시계’ ‘이랴이랴 숯불갈비 시계’처럼 그 시계 관찰 장소를 써넣었다. 그림이 알려지면서 윤씨 시계 그림은 tvN 드라마 ‘마인’에도 등장했다. 드라마 속에서 그 그림은 12억원에 거래된다.
러쉬아트페어 가로수길점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는 이규재 작가는 5살 무렵부터 종이에 동그라미와 네모, 세모 등의 도형 그리기를 반복하며 매일 사과상자 가득 그림종이가 쌓였다고 한다. 부모는 자폐성 장애의 특징인 반복 집착행동으로만 여겨져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제한을 두기도 했습니다. 결국 사춘기가 되면서 비장애친구들과의 차이에 힘들어할 때마다 “이규재는 뭘 해도 꼴찌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음성틱이 생겼다고 한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미술대회에서 상 을 받게 된 후로 “이규재는 꼴찌다. 근데 난 화가지, 상받았지, 이규재는 이규재다”라는 자존감의 표현을 혼잣말로 하는 버릇이 생겼다. 미술로 자존감을 얻고 치유를 하게 된 것. 그는 여행 가고 싶은 곳을 스스로 검색해서 스케줄을 정하고 하나하나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나무와 산, 박물관을 찍은 사진을 컴퓨터에 저장해놓고 생각날 때마다 보며 그 느낌을 그림으로 그린다. 물감 뿐 아니라 혼합 재료로 그린 그의 그림은 마치 물결이 치는 듯 판타지처럼 보인다.
최서은 작가는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했지만 대학졸업 후 늦게 발달장애 진단을 받고 아무 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증에 빠졌다. 그러다 목판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조각칼로 나무를 깎아낼 때의 따뜻한 촉감에 매료돼 나무판으로 주위에 있는 나무와 꽃, 강아지를 그리며 자신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목판화의 매력에 흠뻑 빠져 15년 가까운 시간을 한 길을 걸어왔다. 스스로 발달장애를 안고 있으면서도 판화작업에 ‘생산적 집착’ 을 통해 스스로 ‘힐링(Healing)’하는 방법을 터득한 작가이다.
3살에 자폐 진단을 받은 이다래 작가는 지난 20여 년간 그림으로 세상과 교류해 왔다. 현재 20대 초반인 그는 4번의 개인전을 비롯해 수많은 전시회에 초대됐다. 2014년에는 그림 속 얼룩말이 돌연 작업실에 등장한 장면을 정밀히 묘사해 장애인 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그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 원예 수업과 하루 한 시간 한강 변을 걷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작업실에 머물며 그림을 그린다.
지난 5월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에서 조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이 회담을 마치고 발달장애 화가 김현우(픽셀킴) 작가의 ‘퍼시 잭슨, 수학드로잉’이라는 그림을 감상해 주목을 끌었다. 다운증후군이 있는 김 작가는 자신이 경험하고 상상하는 것을 픽셀로 조형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퍼시잭슨 수학드로잉’은 세로로 칠해진 파랑과 노랑, 주황 바탕에 풀 수 없는 수학 공식이 빼곡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합 교육 방침에 따라 일반 고등학교에서 비장애인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던 김 작가에게 수학 수업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알 수 없는 것들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수업 시간 내내 김 작가는 선생님이 칠판에 그린 도형과 그래프, 수학공식을 자신의 노트에 빼곡하게 따라 썼다. 김 작가가 빼곡히 채운 수십 권의 노트는 이후 2019년 캔버스로 옮겨지면서 작품 ‘퍼시잭슨 수학드로잉’으로 완성됐다.
어릴 적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수십번 넘게 완독했던 김 작가는 ‘퍼시잭슨’ 역시 신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반인반신’인 퍼시잭슨은 김 작가에게 이도 저도 아닌, 어떤 것으로 표현하거나 정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풀 수 없는 수학공식 같았다. 그렇게 ‘퍼시잭슨’이 다루는 ‘번개’의 모양을 본뜬 세로무늬가 수학 공식과 연결돼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한 것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한젬마 씨는 “발달장애인들이 동물을 좋아하고 동물을 그리는 작가들이 유독 많다”며 “특히 깜짝 놀랄 정도로 색감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발달장애인들은 본능적으로 구성력과 표현력, 완성도를 타고나는 이가 많다. 교육에 의해 미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적부터 집요하게 그림만 파고드는 이가 종종 있는데. 그러한 성향을 보이는 이들이 예술가로 성장하곤 한다. 후기인상주의 화가 툴루즈 로트렉도, 낭만주의 대가 고야도, 한국의 운보 김기창 화백도 누구도 장애 화가라 언급하지 않는다. 후천적 장애화가가 된 마티스나 마네는 장애시기의 작품이 더 빛을 발하기도 했다. 장애가 예술을 방해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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