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는 김지영(소유진 임혜영 박란주)의 뒷모습으로 연극은 막이 오른다. 돌이 채 지나지 않은 딸 아이의 울음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운 가운데, 무색무취한 표정으로 집안일과 육아를 하는 지영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죽은 친구, 갓난아기, 친언니, 친정엄마... 지영은 타인에 빙의되는 이상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병의 원인을 찾고 싶어하는 남편 정대현(김승대 김동호)의 시점으로 ‘82년생 김지영’의 삶이 연대순으로 펼쳐진다.
2016년 출간 뒤 국내에서만 130만 부 넘게 팔렸고 미국, 일본 등 30여 개국에서도 출간된 조남주 작가의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을 원작으로 한 동명 연극이 1일 서울 강남구 백암아트홀에서 개막했다.
주인공 지영은 남아선호사상이 공고했던 1980년대에 삼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난 여성. 두 딸보다 막내 남동생을 끔찍이 여기는 할머니, 아버지가 있었던 지영은 남존여비 가풍이 강한 집에서 자랐다. 대학 졸업반이던 지영은 취업 준비하는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라”는 핀잔도 듣는다. 입사 뒤에는 회식자리에서 성희롱을 당하기도 한다. 젊은 여성이니 출산·육아를 할지도 모른단 이유로 인사 불이익마저 받는다. 딸을 낳은 뒤인 경력단절이 돼 아이를 돌보던 지영에게 사람들은 ‘맘충’이라며 손가락질한다.
세월을 거듭하며 크고작은 차별에 시달리던 지영은 “세상이 지영이를 지워간 것처럼”(대현의 극중 대사) 자신이 아닌 타인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극중 지영의 질병은 ‘산후우울증’으로 진단받지만, 출산과 육아 후유증이 병의 모든 원인인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작품은 30여 년간 이어진 ‘82년생 김지영’의 삶을 차례로 보여주며 그 병이 어쩌면 지영의 살아온 총체적 세월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지영의 이상증세가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되긴 힘들 것이라는 비관적 결말을 그렸던 소설과 달리, 연극은 지영의 회복에 초점을 맞춘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방관자이자 구조적 차별에 가담하는 무심한 남성으로 그려졌던 남편은 다소 부족할 순 있어도 지영의 아픔에 공감하고 치유를 위해 노력하는 조력자로 그려진다. 원작이 남성을 차별적 구조의 수혜자이자 공범으로 일반화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의도로 읽힌다. 제작진은 “육아 휴직을 쓰려는 남편들이 직장에서 차별 받고 도태되는 현실을 그린 대현의 에피소드를 원작보다 비중 있게 다뤄 새로운 시선을 제공하려 했다”고 밝혔다.
100분간 이어지는 연극은 장면 전환이 빠르고 늘어지는 대목이 없어 몰입감이 강하다. 연대순으로 흐르는 개별적 사건을 창의적으로 잇는 연출력도 돋보인다. 주연뿐 아니라 1인 다(多)역을 맡은 조연 배우들까지 흡입력 있는 연기를 보여주는 것도 장점. 11월 13일까지, 5만5000~7만7000원.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