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오징어게임’처럼 피비린내 나는 넷플릭스에 지친 걸까. 자극적인 내용이 가득한 유튜브에 질린 걸까. 요즘 유난히 여백이 많고 담백한 콘텐츠를 자주 찾는다. 책도 마찬가지다. 서사가 빽빽하게 가득 찬 것보단 숨 쉴 구멍이 있는 책에 손이 간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을 만났다. 이병률 시인이 2년 만에 펴낸 산문집이다. “사람을 진정 사람이게 하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 그리움”이라는 글귀에 위로받고, 그윽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연인을 찍은 사진을 보고 여러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책을 썼는지 궁금해 16일 이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그는 한국에 없다고 했다. 봄엔 유럽을 돌아다녔고 최근 책을 다 쓴 뒤엔 미국 뉴욕에 머물고 있단다. 그는 혼자 뉴욕의 거리를 다니며 낯선 사람에게 눈인사도 하고 대화하다 글감을 찾기도 한다고 했다.
“시만 썼으면 안 그랬을 텐데 산문을 쓰면서부터 듣는 귀를 열고 다녀요. 여행할 때 노트북이나 휴대폰도 잘 안 쓰고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지도 않죠. 열차나 버스 정류장에 가만히 있다 눈이 마주치면 사람들이 먼저 말을 걸어와요. 자신들의 이야기를 천천히 털어놓죠. 그 이야기를 글로 옮겨요.”
그는 어느 늦여름 밤 제주의 한 바닷가에서 후배 시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새로 작업하는 것이 있냐는 후배의 질문에 “사랑 이야기를 한 권 쓸까?” 하고 무심결에 대답했다가 이 책을 쓰게 됐다. 1년 동안 조금씩 썼고 일부 글은 라디오 프로그램에 보내 연재했다. 가수 이소라가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 작가로 활동한 이 시인의 경력 때문일까. 그의 글은 유난히 낭독하기 좋다.
신작엔 사랑 이야기가 많다. 그는 “긴 시간 동안 셀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최고의 기억을 담아라. 중요한 건 사랑한 만큼의 여운”(‘아무 날도 아닌 날에’)이라고 사랑에 대해 예찬한다. 하지만 그가 그리는 사랑이 항상 달콤한 것만은 아니다. “그대로 한 사람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당신이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이고, “우리는 사랑하다가도 어긋나고, 이어보려 해도 고스란히 해진 자국을”(‘어떤 날에 문득 그런 사람이라면’) 남긴다며 사랑의 실패를 그린다.
“사랑은 언젠가 함몰되거나 상하죠. 하지만 분명 그 이후엔 진화와 성장이 있어요. 사랑이 끝나더라도 사랑을 하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계속 쌓고 있다고 생각해요.”
누군가 이 책에 너무 빈 공간이 많다고, 후루룩 읽으면 30분 만에 다 읽는 책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오랫동안 읽었다. 여백이 있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시인이 쓰는 산문의 장점이 그런 것이 아닐까.
“제 산문집을 시집으로 착각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전 그 어떤 것으로 부르든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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