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그녀는 51세에 법의학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9월 24일 03시 00분


◇아주 작은 죽음들/브루스 골드파브 지음·강동혁 옮김/408쪽·2만2000원·알에이치코리아

미국의 법의학이 조그마한 상자 하나에서 시작됐다면 믿어지겠는가. 1940년대 만들어진 ‘손바닥 연구 모형’이란 상자를 살펴보자. 살짝 섬뜩할 수 있는데, 핏자국이 튄 벽지와 불탄 침대, 목을 매달아 숨진 시체의 미니어처가 세밀하게 표현돼 있다. 사건 현장을 재연한 것이다. 상자 크기는 실제 현장의 12분의 1이다.

이 상자를 처음 만든 건 미국에서 ‘과학수사의 어머니’라 불리는 프랜시스 글레스너 리(1878∼1962)다. 미 메릴랜드주 수석검시관실 공공정보관인 저자는 최초의 여성 법의학자인 리의 생애를 되짚으며 미 법의학의 초기 발전 과정을 살펴본다.

사실 리는 법의학과 관련된 정규 훈련도 대학 학위도 받지 않았다.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의학에 관심이 많았지만, 꿈꿨던 하버드대 의대는 여성을 뽑지 않았다. 당시 여느 여성들처럼 결혼해 가정을 꾸린 리가 법의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무려 51세 때였다. 한 치료시설에서 검시관 조지 버지스 매그래스(1870∼1938)를 만나며 리는 못다 한 꿈을 다시 펼쳐 나간다.

당시 미국에는 ‘코로너’라는 독특한 신분이 있었다. 사망 사건만 다루는 게 아니라 세금을 걷는 일도 했다. 게다가 의학이나 법학은커녕 글도 모르는 이들이 상당수였다고 한다. 주로 고위관료들이 자기 입맛에 맞는 이를 앉히는 ‘정치적인’ 자리였다. 매그래스는 리에게 “제대로 훈련받은 의사가 사망 원인을 진단하도록 제도를 바꿔야 한다. 대학에도 법의학과를 개설해 전문가를 길러야 한다”고 일러줬다.

가족에게 물려받은 재산이 상당했던 리는 법의학을 독학하며 즉각 행동에 나섰다. 1931년 하버드대에 막대한 돈을 기부하고 미 최초의 법의학과를 개설했다. 1934년엔 법의학 전문 도서관도 만들었다. 앞서 언급한 손바닥 연구 모형을 만들고, 경찰 교육생들에게 이 모형을 통해 훈련받도록 했다. 리는 방대한 지식과 뛰어난 업적을 받아 여성 최초로 뉴햄프셔주에서 경찰 경감이 됐다.

현재 미국에는 리가 만든 손바닥 연구 모형 가운데 18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현대 법의학의 관점에선 다소 엉성하지만, 꼼꼼하고 놀라운 표현력은 지금도 놀랍다. 사회에 굴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며 세상을 바꾼 여성에게 경의를 표한다.

#아주 작은 죽음들#비전문적#코로너 제도#문제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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