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넷 재즈 거장 조던 첫 내한공연
약물중독 극복 담은 자작곡 등 불러
관객 즉석 스캣에 소녀미소 화답
“재즈는 삶의 이유였죠. 그게 다예요.”
아흔네 살 노인이 저런 카랑카랑한 음색을 토해 내는 게 가능한 일일까. 24일 서울 마포아트센터 무대에 선 실라 조던은 그 ‘비현실적인 현실’을 몸소 재현해 냈다.
미국 재즈계에서 ‘보컬리제(보컬을 이용한 즉흥연주)의 대가’로 불리는 실라 조던이 한국에 왔다. 공연기획사 플러스히치가 한국에 온 적 없는 재즈 거장의 무대를 여는 기획 ‘더 늦기 전에’의 첫 번째 주인공으로 그를 초청했다. 공연 전날인 23일 중구의 한 호텔방에서 연두색 가운 차림으로 만난 조던은 “서울이 이리 화려한 도시인 줄 몰랐다. 뉴욕을 닮았다. 훨씬 안전하겠지만”이라며 웃었다.
전날 피곤한 기색과 달리 조던은 공연 내내 프로다웠다. 알코올의존증과 약물중독을 재즈로 이겨낸 과정을 담은 자작곡 ‘더 크로싱’부터 전설적인 재즈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1920∼1955)를 만나 재즈에 투신한 내용을 담은 ‘실라스 블루스’까지…. 어느 하나 깊고 진하지 않은 노래가 없었다. 관객들이 스캣(즉흥적 흥얼거림)을 따라 할 땐 소녀처럼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열일곱에 조던을 임신한 엄마는 그를 낳자마자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조부모에게 그를 보냈다. “가난한 동네에서도 제일 가난한 집이었어요.” 그런 조던에게 음악은 “유일한 탈출구”였다고 한다.
“제가 좋은 귀를 가졌거든요. 라디오에서 들은 멜로디를 기억해 악보로 옮긴 뒤 노래로 불렀죠. 엄마는 제가 배 속에서 나올 때 ‘워우’라며 노래를 불렀다고 했어요. 저는 노래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였어요.”
재즈가 삶의 전부였던 어린 시절, 그의 관심은 자연스레 당대 재즈계의 최고 스타인 파커에게 향했다. 조던은 파커의 음악에 가사를 붙여 노래했고, 그의 공연을 찾아 다녔다.
“10대 후반 디트로이트에서 파커 공연을 처음 봤어요. 제가 재즈보컬트리오로 활동하는 걸 안 파커가 ‘여기 재즈 할 줄 아는 아이들이 있다’며 저희를 무대로 불렀어요. 얼떨결에 노래했는데, 공연 뒤 파커가 ‘꼬마야, 넌 백만 달러짜리 귀를 가졌구나’라 말해줬어요.”
그때부터 조던에게 “파커의 음악이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것”은 제1의 소명이 됐다. 파커의 음악과 가까이 있으려 뉴욕으로 이사를 갔을 정도였다. 거기서 파커 밴드의 피아니스트 듀크 조던과 만나 결혼했다.
조던이 재즈에 남긴 발자취는 크다. 데뷔 앨범 ‘Portrait of Sheila’(1963년)는 1939년 설립한 재즈 음반사 블루노트가 발매한 첫 번째 재즈보컬리스트 앨범으로 기록됐다. 2012년 미국 연방예술기금(NEA) 재즈 마스터 상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대중에겐 다소 덜 알려졌다. 남편과 헤어지며 홀로 딸을 키우느라 30대부터 50대까지 사무직 타이피스트 등으로 일했기 때문이다. 아이를 다 키운 뒤에야 재즈계로 돌아왔다.
“스타가 되려고 재즈를 한 게 아니에요. 내가 하고픈 건 재즈 음악을 계속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것, 그게 전부예요.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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