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1 때부터 7년간 가수 ‘오빠’를 좋아했다. 그냥 좋아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팬 사인회에 한복을 입고 등장해 그를 놀라게 했다. 중3 때는 지상파 방송에 한복을 입고 나와 연모의 마음을 담은 자작시를 낭독했다. “여름에는 삼계탕 닭 다리 쥐여주고 싶고...” 오빠는 그런 그를 명확히 인지했다. 사인회 때 먼저 알아보고 반기기 시작했다. 그는 자타공인 ‘성덕(성공한 덕후)’이 됐다. ‘오빠’가 전교 1등을 하라고 해서 진짜 그렇게 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라고 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에 입학했다. 오빠 말은 사소한 말이라도 인생 지침이 됐다. 오빠의 취향, 가치관 등 모든 것이 좋았다. 아예 그 사람이 되고 싶을 정도로 사랑했다.
그런데 10대 시절을 다 바친 그 오빠가 2019년 성범죄자가 됐다. 문제의 오빠는 가수 정준영. 집단 성폭행 혐의 등으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을 확정받았다. 사회에서 영구 격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28일 개봉한 ‘성덕’은 1999년생 오세연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초청됐고 국내 유수 영화제에서 상영되며 호평받았다. 오 감독을 포함해 각자 선망하던 오빠가 성범죄자로 추락하면서 실패한 덕후로 전락한 팬들이 분노와 배신감 등 복잡한 심경을 토로하는 인터뷰가 주축이다. 이들은 한때 그 오빠의 덕후였다는 이유로 범죄를 도운 것만 같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한 시절의 추억과 열정을 모두 도려내는 아픔도 겪었다. 무엇보다 그런 사람인 줄 모르고 사랑한 자신을 미워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상처였다.
오 감독은 27일 전화 인터뷰에서 “정준영 사건은 내게 너무 큰 상처를 준 사건이었다”며 “과거의 덕질을 후회했고 그를 비난했다. 나말고도 여러 오빠들로 인해 상처받은 팬들도 많고 여전히 그들을 옹호하는 팬들도 있더라.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했다.
영화 속에서 팬들은 한때 사랑했던 오빠를 ‘그런 인간’ ‘사회의 악’으로 지칭하며 신랄하게 비판한다. 오 감독 역시 과거 승리의 열혈 팬이었던 김다은 조감독과 함께 앨범, 달력 등 덕질의 증거물인 굿즈를 떠나보내는 장례식을 치르며 과거 떨쳐내기에 나선다.
한편에선 여전히 문제의 오빠들을 옹호하는 팬들이 남아있었다. “우리 오빠 그런 사람 아니다”라며 그를 떠나보내지 못하는 광적인 팬덤이다. 오 감독은 이 지점에서 카메라 방향을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태극기 집회 현장으로 튼다. 태극기가 그려진 수건을 목에 두르고 집회 현장에잠입해 이들이 왜 이토록 박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지 사연을 들어본다. 다만 감독은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도 던지지 않는다. 이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담아낼 뿐. 관객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이다. 오 감독은 “영화를 기획할 때 아이돌 팬덤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우상화 문제를 짚어보는 영화로 만들어보고 싶었다”며 “영화를 보면 범죄자가 된 아이돌의 여전한 팬덤과 일부 정치 팬덤이 비슷하다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연상될 것”이라고 했다.
영화는 감독이 22세 때 만든 작품. 20대 초반의 재기발랄함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대표적인 건 또 다른 오빠를 사랑했던 한 팬을 만나 인터뷰를 하려다 말고 믹서로 요구르트 막걸리를 만드는 장면을 한참 보여주는 부분. 요구르트 막걸리가 갑자기 폭발하고 믹서 위에 얼음덩어리만 남는 장면은 관객을 폭소케 한다. 오 감독은 “이 장면을 영화와 동떨어진 내용으로 보는 분들도 계시더라”며 “우연히 담은 장면이긴 한데 폭발하는 모습이 팬들 처지 같아서 넣었다. 예상치 못하게 터져버리고 얼음만 남는 모습이 어느 날 갑자기 붕괴된 팬덤, 그리고 덩그러니 남은 팬들 모습과 겹쳐 보였다”고 했다.
영화는 ‘실패한 덕후’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치 팬덤으로 논의를 확장하는 동시에 ‘실패한 덕후’들을 위한 위로를 건네는 등 날카로우면서도 감성적이고 단선적인 듯하면서도 입체적인 연출력이 돋보인다.
“그런 사람을 좋아했다고 해서 팬들도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를 좋아했던 시절에 행복했다면 성공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덕질을 했거나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한 번이라도 좋아해 봤다면, 그로 인해 상처받아봤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좋아하는 마음에 대한 영화니까요. 무엇보다 상처받은 이들이 이 영화를 통해 계속해서 누군가를 사랑할 힘을 되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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