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죽이는 사람들
리처드 테일러 지음·공민희 옮김
432쪽·1만9800원·알에이치코리아
남자는 여자를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졌다. 남자는 여자에게 다가갔지만 여자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기만 했다. 남자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분노가 밀려왔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여자를 칼로 수차례 찔러 죽였다. 남자는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 칼로 저지른 살인, 우발적 범행 주장….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읽고 ‘신당역 스토킹 살해범’ 전주환(31ㆍ구속)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건은 영국에서 26년 간 100여 건의 살인 사건을 조사한 법정신의학자 리처드 테일러 박사가 참여한 ‘자비에르 살인사건’이다.
남자는 영국에서 일하는 건축가 자비에르(가명)다. 런던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수지(가명)에게 반해 스토킹을 지속해왔다. 자비에르는 수지를 살해한 뒤 자수하면서 “사건 직후 썼다”며 경찰에 자신의 유언장을 건넸다. 하지만 경찰이 자비에르의 컴퓨터를 조사한 결과 자비에르는 사건 1주일 전에 이미 유서를 작성한 것으로 드러났다. 계획적 살인이었던 셈이다. 법원은 자비에르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테일러 박사는 스토킹 범죄를 ‘사랑의 병적인 확장’이라 부른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할 때 배신감, 질투, 시기 등 여러 감정을 복합적으로 겪는다. 대부분은 이 감정을 잘 소화하지만 일부는 그렇지 못한다. 자존감에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이들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어떻게 날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어? 난 거절할 수 없는 매력을 지녔는데….” 결국 “넌 나한테만 충실해야 해”, “난 널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라는 합리화를 통해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다.
저자인 테일러 박사는 살인자의 동기를 주목한다. 수사기관이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를 찾는다면, 테일러 박사가 파고드는 건 ‘왜 범행을 저질렀는지’다. 특히 살인자의 약 30%가 감형을 위해 범행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사법체계에서 법정신의학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캠든 리퍼’ 사건이다. 영국 연쇄살인마 남성 앤서니 하디는 2003년 매춘부 등 3명의 여성을 성폭행한 뒤 죽였다. 하디는 시신을 절단해 검은색 플라스틱 쓰레기통에 버리는 등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수사기관 조사에서 그는 ‘노코멘트’로 일관했다.
경찰은 연쇄살인에 초점을 맞췄지만, 테일러 박사는 성폭행에 주목했다. 하디의 집에서 포르노 비디오테이프, 다양한 체위를 묘사한 그림이 발견돼 왜곡된 성적 인식을 지녔을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테일러 박사는 하디에겐 특히 성적인 갈망뿐 아니라 여성을 욕망의 대상으로 평가 절하하는 마음도 있었다고 분석한다. 법원은 이 결과를 바탕으로 하디에게 종신형을 선고한다.
말 못하는 어린 자식을 죽인 부모, 푼돈을 노리다 엉겁결에 살인을 저지른 강도, 종교적 믿음에 빠져 끔찍한 테러를 저지른 테러범, 우울증에 시달리다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살해를 한 정신이상자…. 테일러 박사는 끔찍한 사건들을 책에 담은 건 “살인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라고 고백한다. ‘사람을 죽이는 사람들’을 만든 건 사람들이라는 뼈아픈 지적이다. 특히 스토킹 범죄의 배경으로 ‘여성 혐오’와 ‘가부장 문화’를 짚는 테일러 박사의 말을 오래 곱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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