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성 담론, 한쪽에 치우치면 악용될 수도”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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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할 권리/아미아 스리니바산 지음·김수민 옮김/392쪽·2만2000원·창비

“여자들이 날 거부했다. 나는 스물두 살인데도 숫총각이다.”

201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버라에서 6명을 살해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엘리엇 로저는 사건 전 촬영한 영상에서 범행 동기를 밝혔다. 그는 스스로를 외모, 운동신경 등의 문제로 여성에게서 내쳐진 ‘비자발적 순결주의자’로 규정했다. 그는 여성들이 자신에게서 ‘섹스할 권리’를 박탈했으니 이들을 응징하겠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일갈한다. “섹스할 권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여성도 그와 섹스할 의무는 없다.”

1984년생으로 37세에 영국 옥스퍼드대 석좌교수에 오른 여성 철학자인 저자는 21세기에도 고질적인 성 계급 문제에 메스를 갖다댄다. 남성에게 성적 권리가 있다는 잘못된 인식이 어디서부터 형성됐는지 분석하고, 복잡한 이념 지형을 가진 페미니즘과 성적 욕망 등 다양한 관련 논제를 6편에 걸친 에세이로 엮어냈다.

성폭력 피해를 주장하는 여성의 말은 일단 믿고 보는 주류 페미니스트들의 ‘여성을 믿자’라는 구호의 필요성과 맹점을 동시에 짚는 에세이 ‘누가 남성을 음해하는가’를 쓴 저자가 여성이고 페미니즘 철학자라는 걸 고려하면 꽤나 파격적이다. 저자는 날이 무딘 구호가 될 수 있다며 사안을 단순하게 보지 말고 인종이나 계급 같은 요인을 두루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2013∼2014년 미 콜게이트대는 학생의 4.2%만 흑인이었는데, 당시 성폭력 혐의로 고소당한 학생의 50%가 흑인이었다. 자칫 ‘여성을 믿자’는 구호가 흑인 차별에 악용될 수 있다고 경계한다.

저자는 성 대립이란 첨예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지 않는다. 성매매 금지법 도입 주장에 대해서도 성매매는 반대하지만 성매매 여성 종사자들의 생존 문제는 간과하는 문제점을 지적한다. 이 책의 장점은 페미니즘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들을 금방 해결 가능한 문제로 섣불리 축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지나치게 배타적이거나 여성들의 다양한 삶을 차치한 채 모든 여성의 공통성만 강조하는 일부 페미니스트의 행태에 일침을 가하며 페미니즘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는 냉철한 접근이 돋보인다.

#성 담론#섹스할 권리#악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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