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이모티콘 탄생 40주년
1982년 美대학교수 ‘:-)’ 처음 사용
“인터넷에 글만 쓰던 시대엔 상대 표정-감정 알 수 없어 곤란”
“분위기-눈치 살피는 문화 영향”… 한국인, 이모티콘 사랑 유독 심해
《올해 탄생 40주년을 맞은 이모티콘은 이미 모바일 세상에선 ‘제2의 언어’로 자리매김했다. 카카오톡이 이모티콘으로 10년간 벌어들인 수익은 약 7000억 원에 이를 정도. 최근 인종·문화 다양성 논의도 벌어지는 이모티콘의 변천사를 들여다봤다. 언젠간 세상에 이런 속담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이모티콘 한마디로 대출 빚 갚는다.’ ‘잘 키운 이모티콘, 열 자식 배부르다.’
이미 스마트폰에선 문자와 동급. 가끔은 글자보다 표현이 다양하고 상황을 묘사하는 데 더 적확하다. 이모티콘은 21세기 현대사회에선 일상과 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이모티콘이 올해 탄생 40주년을 맞았다. 1982년 9월 19일 미국 카네기멜런대의 스콧 팔먼 컴퓨터과학과 교수가 학내 온라인 게시판에 ‘:-)’을 올렸을 때 과연 이런 영향력을 상상이나 했을까. 기네스북에 ‘최초의 디지털 이모티콘’으로 기록된 이 사건에 대해 팔먼 교수는 미 CNN과의 인터뷰에서 “인터넷에 글만 쓰던 시대엔 상대의 표정이나 몸짓을 알 수 없어 진의를 구별하기 힘들었다”며 “이모티콘이란 수단이 온라인 세상에서 ‘감정의 교감’을 가능하게 했다”고 밝혔다.
특히 한국은 이모티콘에 더욱 열광했다. 미 소프트웨어 회사 어도비의 지난해 보고서 ‘2021년 글로벌 이모지 트렌드’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과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호주보다 이모티콘 사용빈도가 10%포인트 이상 높다. ‘카카오톡(카톡)’을 만든 카카오에 따르면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출시된 이모티콘은 약 30만 개나 되며, 메신저로 발신한 이모티콘은 2200억 건이 넘는다. 한국의 생활 문화는 물론이고 산업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컬처 자이언트’ 이모티콘의 이모저모를 짚어봤다.》
‘마흔살 이모티콘’ 변천사
○ “감정 맥락 중시하는 한국말에 적합”
한국인의 이모티콘 사랑은 어도비의 보고서에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설문에 응한 이들의 76%가 “글자보다 이모티콘 사용을 선호한다”고 답했을 정도다. 나머지 6개국 평균은 55% 정도다. 한국인은 친구나 연인, 가족 같은 사적인 소통은 물론이고 직장 등 조직생활에서도 이모티콘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 한국인은 이토록 이모티콘을 사랑하는 걸까. 전문가들은 한국 사회는 대화에서 ‘분위기’를 중시하고, 상대의 ‘눈치’를 살피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조현용 경희대 한국어교육전공 교수는 “영어나 프랑스어는 문자 그대로 의미를 전달하는 ‘직관적’ 성격이 강하지만 한글은 어떤 상황이나 맥락인지를 봐야 하는 ‘복합적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밥 먹었느냐’는 말은 실제 식사 여부에 대한 질문이기보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안부 인사로 쓰이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한국인이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는 ‘감정 단어’는 430여 개로 다른 언어보다 월등히 많다. 의성어나 의태어의 비율 역시 높다. 이 때문에 비대면 문자로는 소통에 오류가 발생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한국 사회의 상호 교감을 중시하는 문화도 이모티콘의 인기에 한몫했다. 딱딱한 문장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윤활유 역할도 할 수 있고, 대답하기 애매한 상황을 적당하게 넘기기에도 요긴하다.
조 교수는 “기분이나 상황을 표현하는 이모티콘을 쓰면 글로는 어려운 전체적인 분위기를 온전하게 전달할 수 있어 이모티콘의 쓰임새가 확장됐다”고 설명했다.
○ 누적 구매 2100만 명…초등생도 제작
이런 배경은 국내 이모티콘 시장의 폭발적 성장을 이끌었다. 카톡이 국내 소셜미디어 시장에서 이모티콘을 처음 선보인 건 2011년 11월경. 이듬해인 2012년 월간 평균 이모티콘 발송량은 약 4억 건이었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 월 이용자 수가 5000만 명에 이르는 카톡은 한 달 평균 발송하는 이모티콘이 24억 건에 달할 정도다.
자연스럽게 이모티콘 구매자들도 늘었다. 2012년까지 이모티콘을 한 번이라도 구입한 누적 이용자는 약 280만 명에서 지난해 약 2400만 명으로 8.6배로 늘었다. 약 10년 동안 카톡 이모티콘의 총 수익 규모도 약 7000억 원에 이른다. 카카오 관계자는 “지난해 말을 기준으로 하면 카톡 이용자 가운데 매달 2900만 명이 최소한 한 번은 이모티콘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고 설명했다.
이모티콘 산업의 성장은 새로운 직업군도 낳았다. 국내에서 현재 ‘이모티콘 작가’라 불리는 이들은 1만 명 안팎으로 추산된다. 특히 태어날 때부터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게 일상이었던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많다. 지난해 이모티콘 작가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20대가 49.9%로 가장 많고 30대가 34.5%로 두 번째다. 최연소 작가인 12세 초등학생도 있다고 한다.
○ MZ세대, 이모티콘은 자기표현 수단
이모티콘은 이제 젊은 세대에겐 ‘문화의 용광로’로 자리 잡는 추세다. 인기 있는 영화나 드라마, 웹툰이 곧장 이모티콘으로 제작되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다. 이모티콘 자체가 하나의 유행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최근 다양성에 관심이 많은 MZ세대의 특성을 반영한 이모티콘도 많다.
이선영 백석문화대 초빙교수는 “개성을 중시하는 MZ세대의 특성이 이모티콘 시장을 더욱 다양화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모티콘 산업이 성장하면서 그동안 소수라는 이유로 배제돼왔던 이미지들까지도 상품성을 갖게 됐다”며 “나를 닮은 이모티콘을 쓰고 싶어 하는 요즘 세대 특성상 피부색부터 머리 모양, 패션 등 다채로운 이모티콘이 쏟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모티콘 속에 문화 다양성이 반영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해외에서도 마찬가지다. 2017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인 라이우프 알후메디 양(당시 15세)이 미 애플사에 “히잡을 쓴 ‘무슬림’ 이모티콘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알후메디 양은 “친구들과 모바일 메신저로 대화할 때 이슬람교도인 날 표현할 이모티콘이 없다. 히잡을 쓴 여성이 뉴스에만 나올 게 아니라 이모티콘에도 등장해 우리 모두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알리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애플은 이에 응답해 같은 해 히잡을 쓴 여성 이모티콘을 선보였다.
최근 MZ세대에게 화제를 모은 이모티콘 시리즈 ‘와다다다 흥겹다곰’을 만든 전진주 작가(34)도 이에 공감했다. 전 작가는 “돈보단 내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할 이미지를 만들고 싶어 이모티콘 작가가 됐다”며 “가장 나다운 감정을 이모티콘으로 표현해보자는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반응이 클 줄 몰랐다”고 했다.
2020년 3월 평범한 직장에 다니던 전 작가는 이모티콘을 자체 제작해 카톡에 선보였다. 그는 “친구들과 메신저로 대화할 때 ‘힘들다’ ‘좋다’는 글자만으로는 내가 느끼는 감정을 표현하기 힘들었다”고 제작 배경을 설명했다. 현재 그의 이모티콘 시리즈는 ‘카카오 이모티콘 플러스’에서 10위 안에 드는 인기를 끌고 있다.
○ 문화적 다양성 품는 이모티콘 월드
이모티콘이 하나의 국제 통용어로 성장하다 보니 이모티콘의 국제표준을 정하는 움직임도 있다. 세계의 모든 문자를 다루도록 설계된 표준 문자 전산 처리 방식인 ‘유니코드(Unicode)’를 규율하는 유니코드 컨소시엄은 2019년부터 해마다 ‘다양성 이모티콘’ 시리즈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유니코드 컨소시엄은 만국 공통의 문자 코드를 제정해 보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1991년 미국에서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최근 유니코드는 세계에서 누구에게나 친숙한 ‘좋아요’(엄지손가락 치켜세우기) ‘하이파이브’(손바닥 마주치기) 등의 이모티콘을 3가지 피부색과 성별에 따라 모두 만들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컨소시엄 측은 “남녀는 물론이고 백인과 흑인, 아시아인을 다양하게 표현한 이모티콘이 인종과 민족, 성별의 벽을 허물길 기대한다”고 설명했다.
유니코드의 이모티콘에선 ‘이모티콘 강국’인 한국의 영향력도 엿볼 수 있다. 올해 유니코드는 ‘손가락 하트’를 만국 공통의 이모티콘으로 발표했다. 유니코드 컨소시엄은 “손가락 하트는 세계에서 올해 나온 신생 이모티콘 31개 가운데 두 번째로 많이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구글이 남성으로만 제작했던 과학자, 용접공, 정비공, 농부 등의 이모티콘을 여성으로도 만든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구글은 “어린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 이모티콘도 사회윤리 국제규범 지켜야
이모티콘의 파급력이 갈수록 커짐에 따라 이모티콘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특히 이모티콘의 사회적 윤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는 추세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카카오는 올해 1월 내부 가이드라인인 ‘이모티콘 창작자 윤리 지침’에 증오발언 근절 원칙을 추가했다. 카카오는 “창작자들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증오발언과 사회 차별을 조장하는 표현을 경계하도록 하자는 사회적 요구를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윤리 지침에는 구체적인 제한이 담겨 있다. △특정 개인·집단을 멸시하거나 조롱하는 표현 △학교폭력 등 집단 괴롭힘 관련 표현 △외모를 평가하거나 비하하는 표현 △특정 질병·장애를 희화화하는 표현 △특정 종교를 희화화하는 표현 등이 담긴 이모티콘은 출시 자체를 금지하기로 했다.
지난해 해당 윤리 지침 마련에 참여한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가장 큰 원칙은 ‘이모티콘을 통해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특정 집단을 차별하는 표현이 강화돼서는 안 된다’는 데 초점을 뒀다”며 “다른 메신저 플랫폼들도 하루빨리 협의해 공통의 윤리 지침을 만드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성도 고려대 언어학과 교수도 “이모티콘은 이제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 세계인을 연결하는 만국공통어로 자리 잡았다”며 “각국 대표가 참여하는 ‘이모티콘 컨소시엄’을 구축해 인종과 종교, 문화적 차별을 막고 다양성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할 때가 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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