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한림원은 6일(현지 시간) “개인적 기억의 근원과 소외, 집단적 구속의 덮개를 벗긴 용기와 꾸밈없는 예리함을 보여줬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프랑스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2014년 소설가 파트리크 모디아노 이후 8년 만이다.
프랑스 릴본에서 태어난 에르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로 세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루앙대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1974년 자전적 소설 ‘빈 옷장’으로 등단했다. ‘남자의 자리’ ‘사건’ 등 개인적 경험을 통해 사회 구조를 파헤친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상금은 1000만 크로나(약 12억8000만 원)다. 에르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17번째 여성 작가가 됐다. 국내에는 ‘빈 옷장’을 비롯해 ‘탐닉’ ‘집착’ 등 주요 작품이 20권 가까이 출간됐다.
허구 아닌 체험한 것만 글로 써… 낙태-빈곤 등 날것 그대로 ‘폭로’
佛 여성작가 에르노의 삶과 작품세계
소상인 딸로 태어나 교직 거쳐 등단… 사회적으로 금기시되는 주제에 천착 폭력-성적 억압 등 파격적 문학실험… 기성 문단 ‘문학 아닌 노출증’ 비난도 생존작가 첫 갈리마르 총서로 출간 “자신의 가면 파헤친 용기 평가받아”
“우리는 (사회적 문제가 아닌) 작품 자체와 문학적 질에 집중한다. 지난해 수상자는 비(非)유럽인이었고 올해 수상자는 여성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범위를 넓히는 것도 중요하다.”
스웨덴 한림원은 6일 프랑스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82)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발표한 직후 이렇게 설명했다. 문학적 성취를 강조하면서도 페미니즘, 성 문제에 천착해온 여성 작가를 선정한 이유를 명확히 밝혔다. 지난해 수상자는 아프리카 탄자니아 출신으로 영국에서 활동하는 소설가 압둘라자크 구르나(74)였다.
신수정 문학평론가(명지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는 “한림원이 80세가 넘은 여성 작가를 수상자로 선정한 건 자신의 가면을 가차 없이 파헤치는 작가의 용기를 높게 평가한 것”이라며 “젠더와 계급에 대한 억압, 차별을 폭로한 작가를 선정한 한림원 발표에 ‘용감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평가했다.
에르노는 1940년 프랑스 소도시 릴본에서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소상인의 딸로 태어났다. 루앙대를 졸업하고 중등학교 교사가 됐다. 1971년 현대문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한 뒤 2000년까지 문학교수를 지냈다. 1974년 자전적 소설 ‘빈 옷장’으로 등단한 뒤 소설 ‘남자의 자리’로 1984년 프랑스 4대 문학상 가운데 하나인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그의 이름을 딴 ‘아니 에르노 문학상’이 프랑스에서 제정됐다. 2011년 선집 ‘삶을 쓰다’로 생존 작가 최초로 갈리마르 총서로 출간되는 기록도 세웠다.
그는 스스로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단언했다. 실제 2001년 펴낸 대표작인 장편소설 ‘탐닉’에는 허구가 없다. 작가는 자신이 연인과 만나고 헤어지기까지인 1988년 9월부터 1990년 4월까지의 일기를 공개했다. 이 일기를 쓸 당시에도 에르노는 이름난 작가였으며, 연인은 35세의 파리 주재 소련대사관 직원이었다. 에르노는 작가들의 소련 여행을 수행하던 연인과 레닌그라드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파리로 돌아왔고, 연인이 소련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내연 관계를 이어갔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금기시되는 주제에 천착했다. 임신 중절 경험, 노동자 계층의 빈곤, 문화적 결핍, 가부장제적 폭력, 부르주아의 위선, 성적 억압 등에 대해 문학적 실험을 이어갔다.
2002년 출간한 장편소설 ‘집착’에서 그는 감정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추한 모습까지도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 작품에서 ‘나’는 스스로 연인을 떠났다가 곧 연인에게 새로운 애인이 생기자 집착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고백한 것. 2020년 발표한 단편 선집 ‘카사노바 호텔’에서도 폭로는 이어진다. 이 작품에서 현실에 지친 ‘나’는 오랜만에 옛 애인을 만나 근처의 카사노바 호텔로 향한다. 어머니의 병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지만 ‘나’는 애인과 카사노바 호텔에서 사랑을 나누는 파격적인 서사가 펼쳐진다.
폭로를 통해 그가 그려내려 한 건 구원이다. 소상인의 딸로 태어나서 열등감과 자기혐오부터 내면화해야 했던 자신을 구원해준 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이런 자기 폭로를 통해 독자에게 공감과 연대감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모든 버림받고 소외당한 이들을 살아 있게 해준 것이 글쓰기라고 그는 고백한다.
처음 기성 문단은 “에르노의 작품을 과연 ‘문학’이라 부를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폭로로 점철된 ‘노출증’이라고 치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르노의 문학적 도전은 멈추지 않았고, 결국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내면적인 것은 여전히, 그리고 항상 사회적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순수한 자아 속에 타인, 법,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에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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