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겨울, 내 옷장을 열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세어 보았다. 코트 22벌, 원피스 35벌, 파티 드레스 5벌, 재킷 34벌, 치마 37벌, 분류하기 모호한 상의 7벌….’
세계적 패션 잡지 ‘보그’ 창간 이래 가장 오랜 기간 영국 보그의 편집장을 지낸 알렉산드라 슐먼(65)은 편집장직을 내려놓은 이듬해 우연히 옷장을 열었다. 패션 잡지 기자 특성상 그에게 옷은 단순한 의복 그 이상이었다. 옷과 직업상 깊은 연관을 맺었던 그는 25년간 일했던 보그에서 물러난 후에야 “수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진심으로 내 옷을 즐길 수 있게 됐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옷장 속 아이템에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썼다.
저자는 자신의 옷장에 걸려 있던 패션 아이템 하나하나에 질문을 던진다. ‘왜 구매했을까’ ‘이들을 입고 어떤 기분이 들기를 바랐던가’에서 시작해 ‘우리가 입는 옷을 보며 세상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로 확장된다. 빨간 구두, 앞치마, 액세서리, 트렌치코트 등을 소재로 삼은 글은 대개 옷에서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사회, 세상을 향한다. ‘임부복’ 챕터에선 깡마른 몸매가 아닌 ‘사이즈 14’(라지) 여성 최초로 보그 편집장을 지낸 일화를 전하고 ‘브래지어’에선 그가 브래지어를 처음 착용했던 1969년과 2010년에 브래지어를 보는 여성의 관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한다. ‘흰색 셔츠’에선 특정 패션이 어떻게 사회 질서와 권위, 전문성을 상징하게 됐는지를 추론한다.
예술가를 동경했던 청소년 시절부터 유능한 직장인, 잡지사 간부 그리고 아내, 엄마로 살아온 저자의 개인적 경험도 겹겹이 담겼다. 옷을 입는 방식은 무엇보다 삶을 향한 개인의 태도와 연결돼 있다고 강조한다. 책을 다 읽은 독자는 자신의 옷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궁금해져 당장 옷장부터 열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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