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진주의 남강에 어둠이 내려앉으면 잔잔히 흐르는 강물 속에 ‘21세기 촉석루’가 빛을 밝힌다.
올 3월 남강 산책로에 지어진 ‘빛의 루: 물빛나루쉼터’는 콘크리트 기단으로 건물 하단이 지층에서 떨어져 있다. 멀리서 보면 강물 위에 떠 있는 누각(樓閣) 같다. 오목하게 휘어진 지붕은 촉석루의 곡선을 닮았다. 유리창으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건물 안에는 촉석루를 받치는 기둥처럼 6개의 나무 기둥이 서로 겹겹으로 얽히고설킨 채 지붕을 떠받들고 있다.
한국목조건축협회는 지난달 27일 ‘2022년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에서 이 건축물을 준공 부문 대상으로 꼽으며 “촉석루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공공건축물의 예술성을 높였다”고 평했다.
10일 오후 4시경 남강을 거닐던 시민들은 제법 차가워진 가을바람을 피해 물빛나루쉼터에 발을 들였다가 겹겹으로 쌓아올린 나무 기둥을 보고는 “예술이네”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술 작품과도 같은 이 쉼터는 특정인만 누리는 개인 소유 건축물이 아니라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공공건축물이다. 이 건물을 설계한 설계한 김재경 한양대 건축학부 교수(45)는 이날 건물 내부를 촬영하는 관람객들을 바라보며 “누구나 들여다보고 다녀갈 수 있는 공공건축물일수록 조형적으로 더 아름다워야 한다. 건축 예술은 소수의 부유한 건축주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020년 11월 그에게 처음 건축 의뢰가 들어왔을 때에는 부담감이 앞섰다고 한다. 진주라는 도시가 근·현대 건축사에서 갖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진주는 촉석루를 제외한 옛 건축유산 상당수를 잃은 아픔을 간직한 도시였다. 이후 근대 건축의 거장 김수근(1931~1986)과 김중업(1922~1988)이 전통 건축물의 모습을 본 딴 국립진주박물관과 경남문화예술관을 각각 지으며 끊어졌던 진주 건축사의 고리를 이었다.
“위대한 선배 건축가들이 남긴 유산 위에 나는 무엇을 더 보탤 수 있을까…. 고민 끝에 가장 전통적인 방식인 목조 구조물로 가장 현대적인 촉석루를 짓기로 했죠. 못과 같은 금속을 최대한 배제하고, 옛 선조들의 방식처럼 목재를 서로 엇갈리게 짜 맞췄어요.”
나무를 엇갈리게 결부시켜 쌓아올린 전통 다포(多包) 양식으로 재현한 6개의 나무 기둥 덕분일까. 건물 내부에 콘크리트나 철골 구조가 없는데도 단단하게 연결된 나무뿌리처럼 견고해 보인다. 나무 기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백 여 개의 나무 조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빽빽하게 맞물려 있다.
김 교수는 “여러 목재들을 서로 엇갈려 하중을 지탱하면 못이나 철골 구조물 없이도 스스로 서서 지붕을 받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건축가로서 내가 하는 일은 목재의 물성을 최대한 이용한 조형물을 빗는 것”이라고 했다.
못질을 최소화하면서 목조 건축물을 짓기까지 약 2년이 걸렸다. 설계도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만 9개월. 일반적인 건축물과 비교하면 3배가 넘는 시간이 걸린 셈이다. 그는 “목재 조각이 조금이라도 틀어지면 전체적인 틀이 망가지기 때문에 디지털 시뮬레이션을 통해 최적의 목조 구조를 디자인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도 진주시에서는 단 한 번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오히려 진주시는 김 교수에게 “더 과감하고 자유롭게 설계해 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2019년 1월 경남 지역 최초로 ‘공공건축가 제도’를 도입한 진주시는 건축가가 공공건축물에 예술적인 시도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얽히고설킨 나무 기둥의 모습이 누군가의 눈에는 복잡하게 보일 수 있어요. 하지만 이런 색다른 공공건축물들이 우리 주변에 생겨난다면 더 많은 이들이 건축 예술을 누리고, 더 다양한 건축물이 받아들여지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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