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한 달에 한 번, 20세기 현대미술을 돌아보는 시리즈 ‘영감한스푼 클래식‘을 발송해드립니다.
난해하고 불편하게 여겨지는 현대미술은 알고보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사회나 역사와 뗄 수 없는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남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치기와 기상천외한 태도로 생겨난 것 같은 현대미술도, 자세히 뜯어보면 그렇게 생겨나게 된 이유와 맥락이 있답니다.
‘영감한스푼 클래식’은 현대미술 작품들이 왜 그런 방식으로 생겨나게 되었는지, 시대와 역사적 맥락에서 작품을 바라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예술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원인 모를 천재성에 의한 것이 아닌, 삶을 아주 깊고 섬세하게 살아낸 노력의 결과물임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만나 볼 예술가는 ‘에곤 실레’입니다. 에곤 실레는 왜 그렇게 적나라한 누드를 그려야만 했을까요? 그리고 그 누드가 왜 시대를 보여주는 좋은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과거의 오스트리아 빈으로 함께 떠나보겠습니다.
영감한스푼 미리보기: 에곤 실레의 적나라한 누드와 세기말 도시 빈(비엔나)의 욕망
● 오스트리아 출신 예술가 에곤 실레는 자화상은 물론 모델의 초상화에서 과감한 포즈를 취하거나, 성기를 강조하는 등의 표현이 보이는 적나라한 누드를 그렸다. 이러한 누드화는 당시 관객들을 불편하게 했고, 심지어 이런 그림 때문에 처벌을 받기도 했다.
● 실레가 이런 그림을 그리고도 예술가로 인정받는 것은 19세기 말 가장 화려했던 도시 빈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당시 빈은 도시 개발로 급격히 인구가 늘어 다양한 민족과 출신의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정치 체제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이었다.
●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을 변화하는 시대에서 제국이라는 구심점으로 모으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그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공통분모는 '욕망'이었다. 그래서 세기말 빈에서는 인간의 무의식과 욕망을 탐구한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저서 '꿈의 해석'을 비롯한 뛰어난 연구와 예술이 쏟아졌다.
지금봐도 적나라한 에곤 실레의 누드
얼마 전 프리즈 서울 아트페어에서 에곤 실레 작품을 보기 위해 ‘대기줄’이 생길 정도로 관객이 몰렸었죠. 저도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서 작품을 감상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이 작품들에서 ‘유명한 에곤 실레가 그렸다’는 인식을 뺀다면, 지금 이 부스를 채운 많은 사람들 중에 이 그림들을 편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조금 짖궂은 생각인가요. 그래도 상상을 더 전개해보겠습니다. 만약 이름 모를 어떤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면, ‘너무 야하다’, ‘머릿 속에 무슨 생각이 든거냐’, 혹은 ‘작가가 변태 아니야?’라고 화가 날 사람도 분명히 있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에서 종종 불거지는 ‘선정성 논란’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반응은 실레가 살았던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에서도 낯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실레는 1911년 빈을 떠나 고향 크루마우(Krumau)로 연인과 함께 이주합니다. 그런데 이곳 지역 사람들은 실레의 보헤미안 스타일의 생활 방식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그는 결국 다른 지역인 노이렝바흐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1912년 4월, 실레는 ‘공공 부도덕’(public immorality) 혐의로 감옥에서 24일을 보내게 됩니다. 그의 작업실에는 동네 소년, 소녀들이 놀이터처럼 자주 드나들었는데,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 음란한 그림을 걸어 놓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실레 작품을 예술성이 있다고 느꼈다면, 그를 체포하거나 감옥에 가두진 않았겠지요.
그러면 실레는 왜 이런 비난을 무릅쓰고 누드를 그려야만 했던 걸까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당시 주류였던 아카데미 예술에 저항하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실레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렸지만, 예민하고 섬세한 그의 성정은 아카데미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방황하던 시기 실레는 당시 아카데미 밖에서 다른 형태의 예술을 선보이는 그룹, ‘빈 분리파’를 이끌게 되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만나게 됩니다.
그의 그림을 좋아하고 존경했던 실레는 조심스럽게 클림트에게 ‘나의 드로잉과 당신의 것을 교환해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때 클림트는 “너의 드로잉이 훨씬 좋은데 뭐하러 그러느냐”며 실레를 격려하고 자신의 드로잉을 준 것은 물론 실레의 작품도 구매해줍니다.
클림트의 격려에 용기를 얻은 실레는 남들이 좋다고 하는 그림이 아니라, 나의 감각에 깊이 다가오는 것들을 표현하는 길을 더듬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아카데미에서 절대 예술이라고 여기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들의 누드였습니다.
분열 직전의 세기말 도시, 빈
‘아카데미와 다른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라는 것만으로, 실레가 누드를 그린 이유가 다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19세기 말~20세기 초 오스트리아 빈으로 시야를 넓혀 보겠습니다. 이 때 오스트리아는 수백년의 역사를 지닌 합스부르크 왕가와 헝가리 왕국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제국은 금방이라도 산산조각 날 듯한 시한폭탄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모양새였답니다.
우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기이한 이름에서부터 분열의 느낌이 풍겨옵니다. 원래 오스트리아 제국은 신성로마제국부터 이어온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하는 ‘구 왕정체제’의 본산이었죠. 그러나 1848년 파리를 비롯한 유럽 곳곳에서 체제를 뒤엎는 혁명이 일어나고, 오스트리아 제국에서도 수많은 민족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납니다. 그리고 1866년, 프로이센과 전쟁에서 패한 뒤 분열 위기에 처한 오스트리아 제국은 인구 비율이 높았던 헝가리와 손을 잡고 ‘이중 제국’을 세웁니다.
이 제국은 임시방편에 불과했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된 ‘개인’과 ‘자유’의 움직임이 억눌렸다가 1848년에 다시 한 번 터졌듯, 시대의 흐름은 왕이나 황제가 통치하는 제국을 이미 낡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죠. 다만 오랜 시간의 통치 경험이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정치력을 발휘해 잠시나마 체제의 생명력을 연장한 것 뿐이었습니다.
그럼 이 때 실레가 살고 있던 빈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역사학자 필립 블롬은 이 때 빈이 허영심과 욕망이 넘쳐나는 ‘유럽의 라스베이거스’였다고 표현합니다. 1910년 빈은 인구 200만 명으로 세계 6위 규모의 대도시였습니다. 빠르게 산업화된 제국에서 유대인을 중심으로 자본이 축적됐고, 이 화려한 도시로 부와 명예를 쫓아 온갖 지역에서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몰린 결과는 화려하고 아름답지만은 않았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칼 쇼르스케는 빈에서도 노른자땅인 순환도로 ‘링슈트라세’내 중심부의 부르주아들이 귀족을 따라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건축을 통해 지적합니다.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욕망하며 달려가는 가운데, ‘링슈트라세’ 안은 화려했을지언정 밖의 삶은 열악했습니다.
이 때 빈에는 도시화의 문제인 ‘노숙자’가 등장합니다. 당시 기자였던 에밀 클라거와 사진가 헤르만 드라베는 링슈트라세 밖의 슬럼가에서, 특히 도시 아래 하수구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기록합니다. 슬럼가에 대해서는 “13평 남짓한 집에 침대 4개가 놓여있고 그곳에서 성인 7명과 아이 1명이 살았다. 벽에는 1m 높이까지 곰팡이가 껴있고 수도 시설이 없었으며, 지붕은 심각한 수리가 필요했다. 이런 곳에서 각종 질병이 퍼져나갔다”고 쓰여 있습니다. 아름다운 도시 빈의 치부를 드러낸 이들의 취재를 당국은 금지합니다.
귀족을 흉내내는 부르주아가 가득한 화려한 도시. 그러나 온갖 다른 출신의 사람들이 몰려와 질병으로 죽어 나가는 열악한 도시. 반짝이는 것과 더러운 것, 가장 오래된 제국과 그것을 벗어나려는 사람들, 이렇게 반대되는 것들이 한 데 공존하는 시한폭탄같은 사회는 산업화 이후 인류가 마주하게 된 낯선 풍경이었습니다. 실레의 불안한 자화상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지요.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모순적인 도시의 광경에서 실레뿐 아니라 20세기의 가장 흥미로운 것들이 터져나왔습니다. 철학자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 구스타프 말러, 아놀드 쇤베르크도 이 때 빈을 거쳐갔습니다. 또 20세기 지성사를 흔든 중요한 책이 발간됐죠. 바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입니다.
비엔나 커피의 달콤한 크림같은 욕망
이 때 빈은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제시한 바를 증명이라도 하듯, 성적 욕망이 분출하는 도시였습니다.
한 연구에 따르면 1904년 빈에서 성매매에 종사한 여성은 3만 명, 많게는 5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빈의 인구가 150~200만이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입니다. 또 1874년 빈 당국이 성매매 종사자들을 관리하기 위해 건강 검사 증명을 요구했을 때 기사를 보면 이 여성들 대부분은 부수입이 필요한 공장 노동자였다고 합니다. 이 무렵 빈의 홍등가에 사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쓴 엘즈 예루살렘의 소설 ‘붉은 집’이 1932년 발간돼 유럽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합니다.
또 1850년대에는 카메라의 발명으로 포르노그래픽이 유행했습니다. 여성들을 선정적으로 담은 사진들은 성매매 업소에서 고객들에게 보여지는 용도로 주로 사용됐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이런 사진을 찍어서 광고를 할 경우, 사진가와 모델 모두 징역을 살았다고 합니다. 1851년 사진 수천 장을 갖고 있던 한 사진가가 실제로 3개월 형을 선고받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빈에 살고 있던 실레도 이런 도시의 암흑을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매매 산업과 포르노가 성적 욕망을 돈으로 착취했다면, 실레는 이 욕망을 인간의 한 속성으로 기록합니다. 도시의 화려함에 가렸던 치부를 드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욕망은 모순적인 것이 섞인 불안한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공통으로 이해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요소였습니다. 프로이트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성욕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을 이해한 것처럼 말이죠.
빈에서 만들어진 아인슈패너 커피도 그런 도시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쓰디쓴 커피를 하얀 크림으로 덮듯, 세기말 도시의 쓴 맛을 달콤한 욕망으로 이겨내려 했기 때문이죠. 비록 그 단 맛을 과하게 탐닉해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지라도 말입니다. 공교롭게도 실레의 아버지도 성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우리가 실레의 그림을 예술로 보는 이유. 그것이 우리를 1900년대 빈으로 데려가, 모순 속에 살면서 좌절하며 욕망에 탐닉했던 사람들의 불안함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요. 어쩌면 이 비뚤어진 욕망이 폭력적으로 흘러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전 유럽을 환멸에 빠지게 만든 것까지 말이죠. 실레의 누드에서 이런 감정, 여러분도 느끼셨나요?
“내가 나 자신을 볼 때, 내가 원하는 것뿐 아니라 내 안에 일어나는 것, 내가 볼 수 있는 것, 그 범위가 무엇이고 나는 어떤 수수께끼 같은 물질로 만들어졌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내 자신에서 지금까지 무엇을 인식했고, 더 큰 세계에서 그것이 얼마만큼의 비중인지도.나 자신이 점점 증발하고 에너지를 내뿜는 것이 보인다. 내 안의 별빛의 떨림은 더 빠르고, 똑바르고, 단순해지며 세계를 꿰뚫어 보고자 한다.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성취하고, 앞으로 나아가며 내 안에서 빛나는 것들을 만든다.“- 1911년, 에곤 실레가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 ‘영감 한 스푼’은 국내 미술관 전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아래 링크로 구독 신청을 하시면 매주 금요일 아침 7시에 뉴스레터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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