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미술’로 새로운 장르 개척 이어… 2022 공주자연미술비엔날레 운영도
다학제 협업의 생태회복 미술운동 준비… 새로운 지속가능성 모색
봄철, 충남 공주의 계룡산에 신록이 차올랐다. 풀숲에 초록이 물결처럼 흘렀다. 그는 풀숲에 눕고 싶었다. 하지만 초록의 흐름은 깨고 싶지 않았다. 초록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얼굴에는 초록색 풀잎을 그려 넣었다. 풀숲에 눕는 순간 그는 풀숲의 일부가 됐다.
자연미술의 개척자인 고승현 공주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공주비엔날레) 운영위원장(66)의 1989년 작품 ‘풀잎 드로잉’은 이렇게 완성됐다.
자연미술에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추구한다. 충남 공주시 연미산자연미술공원 일원에서 8월 27일 개막한 2022 공주비엔날레 ‘또, 다시야생’도 그런 고민을 담았다. 몽골 작가들이 출품한 설치 작품 ‘자연과의 상관관계’는 변화하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을 강조하고 있다.
공주시와 한국자연미술가협회(야투) 주최로 내달 말까지 열리는 공주비엔날레에는 몽골을 포함해 이탈리아, 우크라이나, 미국, 루마니아, 인도, 독일, 프랑스 등 10개국 자연미술가들의 작품 23점이 출품됐다.
자연미술공원 인근 늘봄정원에서 열리는 자연미술영상전에서는 독일 출신 페터 슈나이더 작가의 ‘불가능한 나무 만들기’ 등 24개국 작가의 57개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공주비엔날레는 1991년 국제자연미술전으로 시작해 2004년 비엔날레로 승격되면서 세계 최대의 자연미술 축제로 발돋움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미술을 서양의 설치 미술이나 퍼포먼스의 카피 버전 또는 아류 전시쯤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자연미술은 41년 전인 1981년 한국에서, 그것도 공주에서 태동했다. 그 후 독일, 헝가리, 이란 등으로 급속히 번지면서 세계적이고 새로운 예술 장르로 발전했다. 이제 한국은 태권도와 마찬가지로 자연미술의 종주국이다. 세계 자연미술계에서 공주비엔날레 참여나 출품이 가장 중요한 이력의 하나로 통한다.
고 작가는 공주에서 발족한 ‘야투’의 창립 멤버로 자연미술의 선구자다. 그를 만나 지난 40여년 동안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화해를 꿈꿔온 자연미술 외길 인생에 대해 들어봤다.
― 자연미술은 어떻게 탄생했나?
“대학(한남대의 전신 숭전대)에서 한국화로 석사학위까지 마쳤다. 그 후 어떤 예술을 추구해야 할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1981년에 동료들과 만든 야외현장미술연구회는 그런 고민의 산물이었다. 공주 금강 둔치에서 합숙하면서 뭔가의 태동을 꿈꿨다. 우린 우선 예술의 근원을 추적했다. 문명 이전 원시 예술에 눈을 멈췄다. 그 때의 환경이 자연이라는데 주목했다. 예술의 새로운 출발점을 자연으로 삼기로 했다. 한국화를 하려면 동양사상을 알아야 하는데, 자연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었다. 자연미술은 제도권에 없던 것이어서 가르쳐줄 스승도 없었다. 불확실한 가운데 나아갔다.”
― 자연미술이란 뭔가?
“자연에 개입하되 자연의 전체 형상을 해치지 않고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되기’, ‘잇기’, ‘숨쉬기’ 3가지 키워드로 말할 수 있다. 자연에 몸을 던져 자연이 되는 것이 되기다. 잇기는 자연의 안과 밖을 이어 소통하고 교감하는 것을 말한다. 숨쉬기는 인간이 태어나고 돌아갈 자연에서 안식을 찾는 일이다.”
― 일종의 퍼포먼스인가?
“예술의 장르를 너무 세분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근대미술의 바람직하지 못한 산물이다. 피카소나 다빈치 같은 거장들은 건축에서 회화, 입체와 평면에 이르는 다양한 세계를 표출했다. 자연미술의 구현 방법은 장소성을 가진 일시적 설치와 그것과 연관된 퍼포먼스다. 강, 모래, 흐르는 강물, 곤충의 움직임, 바람, 태양 등 자연의 모든 것들이 재료다.”
― 구체적인 작품으로 설명해 달라.
“극심하게 가물었던 1988년 갈라진 천장호수 바닥에 알몸으로 누웠는데 이는 되기의 구현이다. 몸으로 갈라진 틈새를 메워 자연의 회복을 기원한 행위다. 보도블록 위 얇게 쌓인 눈에 손바닥을 대 흔적을 남긴 퍼포먼스는 잇기의 한 사례다. 그 흔적은 자연과 인간, 사회를 연결하는 관계와 소통을 의미한다. 작품 ‘고둥과의 합작’은 인간이 해변에 특정한 형태로 배열한 고둥이 스스로 이동하면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 가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주목했다. 인간은 자연과 협업하면서 경외를 경험하고 안식을 취하며 숨쉰다.”
― 자연과의 교감을 강조한다.
“1983년 봄이었다. 입에 한줌의 풀을 물고 공주 산성공원을 소처럼 엉금엉금 기었다. 마주한 소가 그 풀의 한쪽을 물었다. 풀이 혈관처럼 둘을 이어주고 나와 소는 교감하고 감응했다. 이 작품 ‘소와 나’는 시공을 뛰어넘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의 ‘낙타와 나’(2016년), 이탈리아에서의 ‘당나귀와 나’(2019년)로 이어진다.”
― 1960~70년대 미국을 달궜던 대지미술(land art)과도 다른가?
“대지미술은 인공물로 섬 전체를 뒤덮어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방식의 창작이다. 인간의 의지로 만든 포장 속에 삶과 자연은 가려진다. 이것은 삶의 매몰이고 반생태적이다.”
― 자연미술은 이제 전 세계적인 담론으로 발전했다.
“1983년 공주에서 진행한 창작 워크숍에서 ‘자연미술’이란 용어를 처음 제안했다. 그 이후 야투는 금강자연미술비엔날레, 공주 원골 국제 레지던시,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 등을 창설하고 운영하면서 자연미술 담론을 확산했다. 글로벌노마딕아트프로젝트는 각국 작가들과 세계 각 지역을 유랑하면서 창작하는 행사다. 2017년 터키에서 버려진 나무 조각 위에 자연물을 탑재시켜 바다로 띄워 보낸 퍼포먼스 ‘깃털의 여행’이 그런 예다.”
― 가야금 연작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하루도 창작을 거르지 않으려 노력한다. 올해 40점 여점으로 10번째 개인전 ‘나무상자’를 열었다. 일상에서 감지한 생태적 위기를 다뤘다. 2002년부터 몰두하고 있는 가야금 연작을 통해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가야금 재료는 살아있는 나무가 아닌 건설현장에서 잘렸거나 태풍에 전도된 나무다. 산 나무의 생명을 박탈하지 않고 죽은 나무에 생명을 불어 넣기 위해서다. 울리고 사라지는 가야금 소리는 자연의 생성과 소멸을 말한다.”
― 작품은 어떤 방식으로 남나?
“다른 미술에 비해 소멸성이 강하다. 관객은 현장에 남겨진 설치, 작업 영상, 사진 등을 통해 자연미술을 접할 수 있다. 조각공원이나 동상은 가장 확실하게 흔적을 남기는 예술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떤 면에서 영원한 공해다. 보기 싫어져도 어쩔 수 없이 보아야 하는….”
― 공주비엔날레의 공적 가치에 대한 평가가 높다.
“자연미술 작품과 작업 내용이 초중고교 10종 미술교과서에 수록돼 교육적 효과를 입증했다. 공주비엔날레는 문화체육관광부의 2020 전국 비엔날레 평가에서 부산비엔날레와 더불어 최고등급인 ‘2등급’을 차지했다. 국가기록원은 문화예술 분야에서 보존가치가 높은 자료로 지정했다. 공주시는 올해 공주비엔날레를 근현대 유무형 유산 가운데 앞으로의 세대에 남길 가치가 가장 높은 ‘미래유산’으로 선정했다.”
― 공주의 문화예술적 위상을 많이 높아졌을 것 같다.
“공주라는 중소도시가 국제적 명성의 예술 행사의 개최지로 부상하면서 가능성과 자부심이 높아졌다 생각한다. 비엔날레가 횟수를 거듭하면서 총 8km에 달하는 생활공원에 140여 개 작품이 상설 전시돼 자연미술의 메카로 부상했다. 자연미술공원은 지난해 SRT의 최고 여행지에 선정됐다. 자연미술 시민 무료강좌, 지역작가 초대전 등으로 주민들의 문화 욕구를 채웠다.”
― 자연미술의 성과를 기념할 기록화 작업이 진행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공모사업에 선정돼 나의 40년 자연미술 활동에 대한 비평집을 제작할 계획이다. 전문인력들이 내년 말까지 진행한다. 다른 한편으로 공주비엔날레 연구사업으로 야투 40년사를 집필할 계획이다. 외국에서도 관심이 높아 모두 영문판으로도 펴낼 계획이다.“
― 앞으로 자연미술을 어떻게 발전시켜 나갈 생각인가?
“자연미술 작품을 창작하고 보급하는 일과 더불어 지구 생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미술운동을 병행하려 한다. 이를 위해 지구환경과 기후위기를 다루는 다양한 전문가 집단과의 융합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있다. 앞서 진행한 ‘사이언스 월든(Science Walden)’ 프로젝트처럼, 과학자와 교육자, 사회 활동가 등과의 다학제적 협업을 통해 새로운 지속가능성을 모색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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