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7년 5월 한순재는 용산서원에 자신을 내다 팔며 자매명문(自賣明文·평민이 자신을 노비로 팔기 위해 만든 문서)을 남겼다. 평민 신분이었던 그는 봄에 기근이 닥친 뒤 여러 곳에서 돈을 빌렸지만 갚을 방도를 찾지 못하자 결국 자기 자신을 내다 판 것. 1801년 선암외라는 사람은 서원에서 빌린 돈을 갚지 못하자 10살과 7살 난 두 딸을 팔며 “형편상 빚을 갚을 길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내가 낳은 두 딸을 서원에 영원토록 팔아버린다”는 글을 남겼다.
30만여 점. ‘기록유산의 보고’라고 불리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수장고에는 이 같은 조선시대 노비문서뿐만 아니라 양반들이 주고받은 편지, 유서 등 조선시대 민간 고문헌 17만 여 점과 조선 왕실 문헌 12만여 권이 빼곡하게 소장돼 있다.
이곳에서 22년째 고문헌을 탐구해온 정수환 고문서연구실장(48) 등 장서각 소속 연구원 8명이 10일 신간 ‘고문헌에 담긴 조선의 일상’(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을 펴냈다. 20일 오전 전화로 만난 정 실장은 “딱딱한 한문만 가득할 것 같은 고문헌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 냄새 사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며 웃었다.
조선 실학자 황윤석(1729~1791)이 8세부터 62세까지 쓴 일기 ‘이재난고(頤齋亂藁)’ 46책 중 1책에는 18세기 중엽 한양 주택시장에 대한 깨알 정보들이 가득 들어 있다. 1769년 41세에 왕실 족보를 관리하는 관청인 종부시의 종7품으로 승진하며 고향인 전북 흥덕을 떠나 한양에서 벼슬살이를 시작한 그의 일기 속에 한양 주택 임장기가 담긴 것. 고향 땅을 팔아 40냥을 챙긴 그는 4대문 안에 있는 중소형 주택 10여 곳을 돌며 발품을 팔았지만 끝내 마음에 드는 매물을 찾지 못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7급 공무원 1년 연봉으로는 먹고 살기 빠듯했어요. 결국 황윤석은 ‘내 집 마련’의 꿈을 포기하고 하숙생으로 한양에서 살아요. 지방 청년들이 서울서 살아남기 힘들다고들 하잖아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고문헌은 짧은 생을 살다간 충신의 생애를 복원하는 단서가 돼주기도 한다. 정 실장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다 전쟁이 끝난 직후 청나라에 끌려가 죽임을 당한 오달제(1609~1637)가 남긴 문집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에서 그의 흔적을 찾았다. 1633년 인조 집권 당시 그가 제출했던 과거급제 답안지가 담긴 것. 인조는 국가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동전 유통 정책을 펼치기에 앞서 과거시험에 ‘동전을 유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을 서술하라’는 문제를 출제했다. 오달제가 25세 때 제출한 답변은 출제자의 의도를 뛰어넘어 문제의 본질을 건드리고 있었다.
‘동전을 만드는 것은 임금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위한 것입니까? 나라를 이롭게 하려는 것입니까? 민심이 고통스럽게 여기면 이 법은 성공하지 못하고 폐기될 것입니다.’
정 실장은 “오달제는 시험에서 임금에게 잘 보이는 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청년은 당돌하게 임금을 향해 동전을 유통함으로써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진 않았는지를 되묻고 있다”며 “이 자료 덕분에 29세 짧은 생을 살다간 오달제의 곧은 성정을 기억할 수 있게 됐다. 오달제의 의리는 임금을 향했다기보다 백성을 향했던 것”이라고 강조했다.
“의미 없어 보이는 낙서도 연구하는 이의 ‘안목’에 따라 재발견될 수 있어요. 그 낙서에서 옛 조선의 유머 코드를 읽어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아직까지 이야기를 발견해줄 ‘임자’를 기다리는 고문헌들은 많이 있습니다. 후학들과 함께 앞으로도 저는 옛 문헌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찾아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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