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병변과 지적 장애를 가진 동생은 서른이 넘었지만 정신 연령은 3살이다. 온종일 TV 앞에 앉아 번쩍이는 화면만 바라보는 동생에게 TV 속 세상을 들려주고 싶었다.
영화를 볼 때면 마치 스무고개 놀이를 하듯 동생이 이해하기 쉬운 언어를 골라냈다. “왕자님이 하늘에서 구름 타고 궁궐로 내려왔어. 전우치가 그림 속으로 슝 들어 간 거야.” 한 장면이라도 더 들려주고 싶어 동생에게 계속 말을 건네다 보니 자연스레 ‘화면해설 작가’를 꿈꾸게 됐다.
2011년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미디어접근센터에서 화면해설 작가 양성교육을 받으며 화면해설의 세계에 입문한 임현아 작가(37)는 어느덧 영화 ‘체포왕’(2011년), KBS1 다큐멘터리 ‘동행’ 등을 해설한 12년차 베테랑 작가로 성장했다.
화면해설 작가는 영화, 드라마 등 영상에 나오는 등장인물의 몸짓과 표정, 때와 장소의 변화를 풀어 쓰는 일을 한다.
11년 전 임 작가와 함께 화면해설 작가의 세계로 입문한 권성아(51), 김은주(46), 이진희(46), 홍미정 작가(51)는 12일 화면해설 작가로서의 일상을 담은 에세이 ‘눈에 선하게’(사이드웨이)를 펴냈다.
서울 마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19일 만난 이들은 “화면해설 작가란 초행길을 찾아오는 친구에게 길을 알려주듯, 시각장애인 등 영상 해설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보이는 모든 것들을 꼼꼼하게 들려주는 사람”이라며 “더 많은 이들에게 화면해설 작가의 세계를 알려주고 싶어 책을 냈다”고 말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된 403편 가운데 화면해설이 포함된 작품은 3%, 10여 편뿐이에요. 10년 전에 비하면 많이 늘어난 수치이지만 아직까지도 시각장애인들에게는 선택지가 부족해요. 큰 변화를 바라는 게 아녜요. 보고 싶은 영화를 함께 즐기자는 겁니다.” (홍 작가)
국내 지상파 방송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 서비스가 시작된 지 올해로 21년째.
2011년 방송법이 개정되면서 지상파·보도채널·종합편성채널은 전체 방송의 10%를, 기타 방송사업자도 5~7%를 화면해설방송으로 편성하도록 의무화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김 작가는 “방송사에서는 의무 할당량만 채우면 된다는 인식이 만연하다. 연말쯤 화면해설방송 할당량을 다 채우면 멀쩡히 진행하던 해설 방송이 중단되는 일이 지금도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면 제가 해설하는 방송의 시청률부터 확인해요. 시청률이 저조하면 화면해설방송이 가장 먼저 사라지거든요.” (김 작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일이지만 화면해설 대본을 살펴본 시각장애인 모니터링 요원이 “해설이 아주 좋아요. 안 봐도 비디오!”라고 칭찬해줄 때가 가장 뿌듯하다고 한다.
권 작가는 “배우들의 몸짓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다 보니 드라마 속 5분을 설명하기 위해 5시간을 고민할 때도 많다”면서도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장 정확한 표현을 골라내는 것이 우리의 일”이라고 힘줘 말했다.
특히 권 작가는 올 4월 종영한 tvN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해설을 맡았을 때 “막막한 심정이었다”고 털어놓았다.
주인공 나희도(김태리 역)와 백이진(남주혁 역)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에 나오는 대사는 단 다섯 마디뿐이었다. 이들이 주고받는 눈빛과 몸짓이 대사보다 더 중요한 단서였다. 결국 같은 장면을 수백 번 돌려본 끝에 이런 해설이 나왔다.
‘희도가 지나쳐 가는 이진의 팔을 잡는다. 이진의 눈길이 희도에 손에서 천천히 희도의 얼굴로 향한다. 희도는 이진의 눈을 피하지 않는다. 이진은 팔을 붙잡힌 채로 희도의 말을 듣고 있다. (중략) 희도는 떨리는 눈빛으로 이진을 올려다본다. 이진의 떨리는 눈동자도 희도만을 향해 있다.’
“멜로드라마에서는 대사보다 등장인물의 몸짓이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질 때가 많아요. 비시각장애인들은 사소하게 스쳐 지나갈 몸짓 하나도 놓칠 수 없죠.” (권 작가)
이들의 휴대전화 메모는 온갖 사물의 이름들로 빼곡하다. 이 작가는 소설과 시를 찾아 읽으며 하나의 장면을 표현할 다른 말들을 찾아낸다.
그는 “화면해설을 하면서 귀에 착 달라붙는 표현 하나를 찾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을 때가 많다”며 “등장인물들이 눈빛을 주고받는 장면도 ‘시선이 닿는다, 머문다, 향한다, 멈춘다, 고정돼 있다, 시선을 돌린다, 눈길을 거둔다’ 등으로 상황에 따라 다르게 쓸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저는 글을 쓰지만 시각장애인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뻔한 표현 말고 가장 적확한 표현을 찾아서 등장인물이 느끼는 아주 작은 떨림까지 들려주고 싶어요. 우리는 화면해설사가 아니라 화면해설 ‘작가’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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