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문체까지 흉내내 글쓰는 AI… “산문은 합격, 운문은 아직”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23일 12시 37분




“이은은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의 딸 마사코와 결혼했다. 이은은 일본 황족과 결혼한 첫 한국인이 됐다.”

이 문장은 인공지능(AI)이 창작했다. 올 8월 출간된 김훈 장편소설 ‘하얼빈’(문학동네)의 첫 세 문장을 입력하자 이에 이어지는 소설을 내놓은 것. 작가와 작품명은 물론 이 문장이 ‘소설’이라는 힌트도 주지 않았는데 AI는 그럴듯한 글을 써 내려갔다. 영친왕(英親王·1897∼1970)을 이은이라 부르고, 역사적 사실을 나열해 소설의 배경을 간결하게 전달하는 김훈의 문체도 쏙 빼닮았다.

이 문장을 창작한 건 ‘코지피티(KoGPT)’다. 코지피티는 현재 AI 가운데 최고 수준의 자연어처리 모델로 꼽히는 영어 기반의 ‘GPT-3’을 카카오브레인이 한국어로 학습시킨 AI다.

컴퓨터가 이해할 수 있는 최소 언어 단위인 ‘토큰’ 2000억 개와 다양한 결과를 도출하도록 돕는 ‘매개변수’ 60억 개를 학습해 ‘똑똑한 작가’가 됐다. 백운혁 카카오브레인 오픈리서치 조직장은 “AI가 소설을 창작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데이터 중 이같은 문장이 등장할 빈도가 높다는 결과를 내놓은 것”이라며 “‘하얼빈’이 역사적 사실에 기반 한 작품이라 이른바 ‘말이 되는’ 문장을 추출하기 쉬웠던 것 같다”고 했다.



최근 예술 창작 분야에서 AI가 적극 활용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 ‘사피엔스’(김영사) 출간 10주년 기념 특별판 서문에 GPT-3이 쓴 글을 실었다. 미디어아트그룹 슬릿스코프는 올 8월 코지피티를 활용해 AI 시집 ‘시를 쓰는 이유’(리멘워커)를 펴냈다.

이지용 문학평론가는 “창작하는 AI는 공상과학(SF) 소설 속 미래가 아닌 현재”라며 “AI를 동반자이자 경쟁자로 여기는 예술가가 늘어나고 있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AI 창작의 가능성을 확인해보기 위해 카카오브레인이 이달 13일 대중에 공개한 코지피티로 창작을 해봤다. 유명 소설, 드라마, 영화, 시, 노래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을 실험 대상으로 삼았다.

실험은 카카오브레인의 조언을 받아 기자가 이달 14일부터 23일까지 진행했다. AI 창작 문장은 실험 시점에 따라 매번 다른 결과를 도출했다.

코지피티는 산문에서 합격점이었다.

예를 들어 동명의 애플TV드라마로 화제를 끈 이민진 장편소설 ‘파친코’(인플루엔셜) 첫 세 문장을 넣자 코지피티는 “어느 날 두 사람이 하숙을 치고 있던 집의 주인이 급사했다. 얼마 뒤 부둣가에 새로 생긴 가건물이 하숙집으로 등장했다. 어느 날 밤 그 가건물에 불이 났다”는 소설을 만들어냈다.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파친코의 첫 문장처럼 감칠맛은 나진 않았지만, 늙은 어부와 아내가 하숙을 치면서 벌어질법한 일을 그럴듯하게 상상해냈다.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주인공인 우영우가 법정에서 한 자기소개도 입력해봤다.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다음 기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검사는 피고인에 대한 신문을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는 결과가 나왔다.

변호사의 발언이라는 점을 인식해서 검사를 향한 발언을 만든 듯 했다. 다만 말을 더듬거나 엉뚱한 소리를 하는 캐릭터의 특성은 살리지 못했다.

운문 창작은 아직 초보 단계였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을 넣자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나는 너를 믿는다”라는 뻔한 문장을 내놓았다.

아이유의 노래 ‘좋은 날’ 가사를 넣자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 어떡해”만 반복했다. 시적인 대사로 유명한 박찬욱 감독의 영화 ‘헤어질 결심’ 대사를 넣었더니 오류가 난 것처럼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만 되풀이했다.

박인성 문학평론가는 “예술 창작은 논리력도 필요하지만 기존 틀을 비트는 창의적인 시도가 중요하다”며 “AI가 인과관계 파악은 잘하지만 어린아이보다 창의력은 떨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카카오브레인이 서비스 적용 범위를 넓혀갈 것이라고 계획을 밝힌 광고 문구 활용은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공기청정기와 관련된 키워드를 넣었더니 “강력한 공기청정기능은 기본이고 스마트폰 제어와 이동식 바퀴 기능도!”라는 광고 문구를 만들어냈다. 이민영 카카오브레인 사업개발팀 매니저는 “AI가 창작자를 대체하지는 못하지만, 창작자가 옆에 두고 활용할 수 있는 보조도구는 충분히 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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