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문체까지 흉내 내는 AI… 소설은 ‘합격’, 시-가사는 ‘낙제’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0월 24일 03시 00분


글 창작 AI ‘코지피티’ 실험해 보니
‘파친코’ 스토리 그럴듯하게 만들고 ‘하얼빈’ 김훈 간결한 문체 따라해
시-가사 등 함축적 글에선 ‘오작동’, ‘좋은 날’ 마지막 문장 세번 반복도
“인과관계 잘 파악, 창의력은 떨어져… 창작자 힘들어도 ‘창작도우미’ 가능”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20세기로 넘어갈 무렵, 늙은 어부와 아내는 가욋돈을 얻을 요량으로 하숙을 치기로 했다. 두 사람 모두 영도라는 어촌에서 나고 자랐다.’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의 첫 세 문장이다. 이다음 내용을 인공지능(AI)은 어떻게 쓸까?

‘어느 날 두 사람이 하숙을 치고 있던 집의 주인이 급사했다. 얼마 뒤 부둣가에 새로 생긴 가건물이 하숙집으로 등장했다. 어느 날 밤 그 가건물에 불이 났다.’

카카오브레인이 13일 일반에 공개한, 글을 창작하는 AI ‘코지피티(KoGPT)’가 쓴 내용이다. 최근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출간 10주년 특별판 서문엔 AI ‘GPT-3’가 쓴 서문이 실려 화제를 모았다. 하라리는 AI의 글에 대해 “잡동사니가 섞인 잡탕”이라면서도 “우리가 알던 방식의 인류 역사가 끝났다는 신호”라며 놀라움을 표했다.

동아일보는 국내 AI의 글짓기 실력은 어느 정도인지 코지피티로 실험해봤다. 코지피티는 사피엔스의 서문을 썼던 GPT-3에 한글을 학습시킨 AI. 컴퓨터 언어 단위인 ‘토큰’을 2000억 개 학습했고 다양한 결과를 도출할 ‘매개변수’도 60억 개를 배웠다고 한다.

코지피티에 소설과 시, TV드라마 대사, 영화 대사, 대중가요 가사 등을 입력해봤다. 일단 산문은 만족스럽진 못해도 ‘합격점’을 줄 수준은 됐다. ‘파친코’ 다음 문장처럼 뜬금없어도 뭔가 이야기가 이어졌다. 어부 부부에게 벌어질 법한 일을 그럴듯하게 상상해냈다.

김훈의 장편소설 ‘하얼빈’은 더 놀라웠다. ‘1908년 1월 7일, 일본 제국 천황 메이지는 도쿄의 황국에서 대한제국 황태자 이은을 접견했다. 이은은 열두 살이었다.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 황태자의 보육을 책임지는 태자태사의 자격으로 작년 말 이은을 서울에서 도쿄로 데려왔고 이날 메이지의 어전으로 인도했다’를 넣었다. 코지피티는 ‘이은은 일본 황족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의 딸 마사코와 결혼했다. 이은은 일본 황족과 결혼한 첫 한국인이 됐다’고 썼다.

작가와 작품명은 물론이고 ‘소설’이란 힌트도 주지 않았는데, 영친왕(1897∼1970)을 이은이라 부르며 김훈의 간결한 문체를 어느 정도 흉내 냈다. 백운혁 카카오브레인 오픈리서치 조직장은 “소설을 창작했다기보다는 수많은 데이터에서 이런 문장이 등장할 빈도가 높다는 결과를 내놓은 것”이라며 “하얼빈이 역사소설이라 ‘말이 되는’ 문장을 추출하기 쉬웠다”고 했다.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도 나쁘지 않았다. 우영우(박은빈)의 법정 대사를 넣자 코지피티는 ‘사건의 자세한 내막은 다음 기일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검사는 피고인에 대한 신문을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썼다.

반면 시, 노래 가사처럼 의미가 함축적인 글에는 ‘오류’에 가까운 결과를 내놓았다.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를 입력하자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좋아한다/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이어갔다. 아이유의 노래 ‘좋은 날’의 가사 ‘한 번도 못했던 말/ 울면서 할 줄은 나 몰랐던 말/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 어떡해’를 넣었다. 그러자 마지막 문장 ‘나는요 오빠가 좋은걸 어떡해’만 세 번 반복했다.

이에 대해 박인성 문학평론가는 “AI가 인과관계는 잘 파악해도 어린아이보다 창의력은 떨어진다”고 평가했다. 이민영 카카오브레인 사업개발팀 매니저도 “AI 학습 데이터에 운문이 적고, 줄 바꿈 등 형식이 바뀌면 변수가 늘어나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다만 광고 문구 작성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공기청정기’ ‘필터식’ ‘숯탈취 필터’ 등 관련 단어 몇 개를 넣으니 ‘강력한 공기청정 기능은 기본이고 스마트폰 제어와 이동식 바퀴 기능도! 집 안 공기 걱정 끝!!’이라는 어디서 봤음직한 문장이 쏟아졌다. 온라인에 광고 문구가 워낙 많아 학습량도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전문가들은 AI가 제대로 된 창작자가 되긴 힘들어도 ‘창작 도우미’는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 매니저는 “AI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내용을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에 인간 창작자와 경쟁자는 못 돼도 동반자는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이지용 문학평론가는 “인간이 비슷한 플롯과 패턴을 반복해 뻔한 작품만 만들면 AI에게 밀려날 수 있다는 경고”라고 말했다.

#글 창작 ai#코지피티#소설 합격#시-가사 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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