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김금숙 작가(51)의 어머니는 프랑스 파리에 사는 딸을 만나러 왔다가 이렇게 말했다.
1933년생인 어머니는 평양에 살다 전쟁 때 피란 왔다. 상처 때문인지 가족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KBS TV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방송을 보면서 엉엉 눈물을 흘리곤 했다. 통일부 남북이산가족찾기를 통해 언니를 찾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김 작가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녹취하고, 다른 이산가족을 찾아 이야기를 들었다.
이런 사연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 이산가족의 슬픔을 그린 그래픽노블 ‘기다림’(2020·딸기책방)이다. ‘기다림’은 미국 하비상 2022년 최고 국제도서 부문 후보에 올 8월 올랐다. 하비상은 저명한 만화가이자 편집자인 하비 커츠먼(1924∼1993)을 기려 ‘만화계의 오스카상’으로 불린다.
최근 에세이 ‘시간이 지날수록 빛나는’(남해의봄날)을 펴낸 김 작가는 25일 통화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과 상처를 오래 지켜봤다”며 “가족의 이야기와 삶의 경험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나’를 고민하는 계기가 됐고 작품으로 이어졌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만화와 소설의 중간 지점에 있는 그래픽노블엔 작화 실력 못지않게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그림을 못 그려도 진정성이 담긴 작품이라면 좋은 그래픽노블이에요. 제 곁에 있는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한 이유죠.”
그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을 그린 ‘풀’(2017·보리)로 2020년 하비상 최고 국제도서 부문을 수상했다. ‘풀’은 미국 뉴욕타임스(NYT) ‘최고의 만화’, 영국 가디언지 ‘최고의 그래픽노블’ 등을 휩쓸었다. 그가 먹과 붓으로만 그린 한국의 그래픽노블이 세계를 감동시킨 것이다.
“먼 이야기가 아닌 우리 어머니가 살던 시대의 이야기잖아요. 우리가 직접 피해자는 아닐 수 있지만 위안부 피해자의 아픔이 대한민국과 여성의 슬픔 그 자체이지 않을까 생각이 들더군요. 2017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이옥선 할머니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어요. 위안소가 있었던 중국 상하이, 하얼빈을 직접 가기도 했죠.”
신간엔 1994년 세종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스트라스부르 미술학교에 다니다 2010년 귀국해 작품활동을 하는 그의 인생 궤적도 담겼다. 왜 배꼽 잡고 웃을 수 있는 만화가 아닌 힘든 역사를 직시하는 작품을 그리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슬픔을 응시한 작품은 독자 뇌리에 오래 남아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것이 더 삶을 닮았거든요. 마시고 난 뒤에도 향이 떠나지 않는 차(茶) 같은 작품을 계속 그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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