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물이 인공지능으로 연결된 미래, 완벽한 정전(停電)이 찾아온다면….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추락한다. 컴퓨터 화면이 갑자기 검게 변한다. 휴대전화도 작동을 멈춘다. 엘리베이터, 난방기, 냉장고도 사용할 수 없다. 미국 소설가 돈 드릴로의 장편소설 ‘침묵(The Silence)’의 한 장면이 묘사한 초연결사회의 종말이다.
2017년 출간한 ‘피로사회’(문학과지성사)의 저자로 유명한 재독 철학자 한병철 전 베를린예술대 교수(63)는 지난달 15일 ‘카카오 데이터센터 화재’로 인한 데이터 재난 상황을 지켜보며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초연결사회가 남긴 그림자를 철학적으로 사유한 신간 ‘사물의 소멸’(김영사)을 최근 펴낸 그는 2일 동아일보와 나눈 e메일 서면 인터뷰에서 “단지 소설 속에서만 벌어지는 종말이 아니다. 기술에 대한 우리의 의존이 점점 더 심해진다면 실제로 종말론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고요와 공포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종말론적인 것은 사람들이 서로 이야기할 수 없음을 깨닫는 장면이에요. 사람들은 그제서야 (컴퓨터와 휴대전화 없이) 이야기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자각하죠.”
한 교수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가 손에 잡히는 물건으로 둘러싸였던 ‘사물권의 시대’에서 손에 잡히지 않고 새로운 정보가 끊임없이 흐르는 ‘정보권의 시대’로 바뀌었다고 분석한다. 추억으로 가득 찬 두터운 사진첩은, 휴대전화 용량이 부족하면 언제든 삭제할 수 있는 ‘디지털 사진첩’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한 교수는 “이런 시대에는 인간관계도 실재하지 않고 네트워크에서만 존재한다”고 진단했다. 팔로우 취소 버튼 한 번이면 소셜미디어에 가득 찬 인간관계를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세상이다.
“소셜미디어는 인간관계를 무제한으로 연결시켰는데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롭습니다. 버튼 하나면 언제든 서로가 서로를 처분할 수 있는 처지가 됐기 때문입니다.”
한 교수는 음식, 영화, 책, 쇼핑 목록은 물론 내가 좋아할 만한 친구까지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알아서 추천해주는 시대에는 “인간의 주체성마저 소멸하고 말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이제 인간은 스스로 일상을 통제하지 못하고 ‘스마트홈’을 비롯한 사물인터넷의 통제 아래 놓여 있다”며 “오늘날 우리는 진정한 선택권을 더는 갖고 있지 않다”고 경고했다. 그는 책과 인터뷰 내내 ‘디지털 감옥’이라는 표현을 수차례 강조했다. 마치 독자들에게 경고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디지털 감옥에 갇힌 우리는 그저 ‘좋아요’를 누르는 노예일 뿐입니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추천한 선택지를 골라잡을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가 고른 것이 진정 우리가 원하는 것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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