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미술관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展
정선-김정희-장승업 걸작부터
한국적 소재 시대순으로 구성
시대-국적 뛰어넘어 발견되는 ‘한국적이라는 느낌’의 근원 고찰
담백한 꽃과 새, 은은하게 펼쳐진 산과 강, 호젓한 정자에 걸터앉은 선비와 아이….
여기까지만 보면 여느 한국화 전시 중 하나라 여길지 모르겠다. 익히 알지만 친근하고 좋은 기운에 발걸음이 차분해진다. 그런데 드문드문 뭔가 좀 낯설다. 어진(御眞·임금의 초상)인가 싶어 들여다보니 마이클 잭슨이고, 불화처럼 보여 다가가니 덥수룩한 수염의 성인 남성 천사라니. 도대체 무슨 전시일까.
서울 종로구 일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기획전 ‘다시 그린 세계: 한국화의 단절과 연속’은 낯익음과 낯섦이 공존하는 독특한 전시다. 기본적으로 일민미술관이 소장한 겸재 정선(1676∼1759)이나 추사 김정희(1786∼1856), 오원 장승업(1843∼1897) 등 조선시대 걸작부터 시대순으로 관람할 수 있는데, 그 사이사이에 ‘이질적인’ 작품들이 포진해 있다.
뭔가 뒤섞인 듯 보이지만 구분은 어렵지 않다. 작품이 전시된 벽지를 보면 안다. 전시의 뼈대를 이루는 고전은 회색 벽지에 배치됐고, 현대 작품은 사이사이에 다른 색깔의 벽지에 자리하고 있다. 장서영 일민미술관 에듀케이터는 “작품들을 섞어 진열함으로써 과거에서 현재를 만나고, 현재에서 과거를 살피는 체험을 통해 한국화의 정의를 다시금 고민해 보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모두 43점이 출품된 고전 작품들은 하나하나가 보물급이다. 18세기 한강에 있던 정자를 그렸다는 겸재의 ‘숙몽정’과 서예 필선이 도드라지는 추사의 ‘사시묵죽도사폭병’, 실험적인 구도가 눈길을 사로잡는 오원의 ‘화조도’는 발길을 한참 동안 멈추게 한다.
근현대 고전도 만만찮다. 소나무와 선비 아홉 명을 그린 고희동(1886∼1965)의 ‘송하관류도’(1927년)와 설산 풍경을 담은 박승무(1893∼1980)의 ‘설청계방’도 놓치기 아깝다. 본격적인 채색 한국화가 등장하는 2층 전시도 범상치 않다. 김은호(1892∼1979)의 ‘미인도’부터 서세옥(1929∼2020)의 ‘춤추는 사람들’, 황창배(1947∼2001)의 ‘새로 쓰는 선비론 삽화’ 시리즈에까지 이르면 한국화의 역사를 아우를 수 있다.
고전이 감동이었다면, 현대 한국화는 재미지다. 손동현의 2008년 작 ‘왕의 초상(P.Y.T)’은 마이클 잭슨이 조선 임금의 어진처럼 포즈를 잡고 앉았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한양’(2022년)은 정선의 산수화를 애니메이션에서의 공간처럼 해석했다. 박그림의 ‘심호도’ 시리즈(2021∼2022년)는 고려·조선 불화의 도상이지만 곳곳에 현대인의 얼굴과 민화적인 호랑이가 등장한다.
한국 작가가 그리지 않은 작품도 있다. 겸재와 오원의 작품 사이에 있는 ‘과거에 대한 고찰’(2021년)은 프랑스 화가 로랑 그랑소(50)의 회화다. 3개 화폭으로 구성된 작품은 왼쪽에 윤두서(1668∼1715), 오른쪽엔 겸재 그림을 재해석한 회화를 그려 넣었다. 가운데 화폭엔 동그라미가 중첩된 광원(光源)이 포진했다. 장 에듀케이터는 “광원은 과거와 현재의 시공간을 아우르는 통로를 상징한다”며 “시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가장 한국적인 느낌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담았기에 이번 전시와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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