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정 “예전 대학로 연극판서 남자역할만 맡은 이유는…”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8일 14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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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빛나는 버러지’에서 미스터리한 시청공무원 미스 디를 연기하는 황석정. 송은석 기자


“평범하지만 판타스틱하고 경쾌하지만 아주 무시무시한 이야기!”

배우 황석정(51)은 한창 연습 중인 자신의 차기작 연극 ‘빛나는 버러지’를 이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29일 서울 종로구 드림아트센터에서 개막하는 ‘빛나는 버러지’는 영국 출신 극작가 필립 리들리가 쓴 3인극으로 지난해 낭독공연에 이어 올해 초연을 앞두고 있다.

7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섬뜩한 이야기를 마치 자전거 타고 산책하듯, 마트에서 쇼핑하듯 산뜻하게 풀어낸 수작”이라며 “어디서도 볼 수 없던 이야기라 보는 관객들도 숨통이 확 트이는 기분일것”이라고 했다.

2015년 영국 런던의 소호극장에서 초연된 ‘빛나는 버러지’는 주거 문제라는 외피에 담긴 인간의 욕망을 주제로 한 희곡이다.

영국 런던에 거주하는 무주택자 부부 질(송인성 최미소)과 올리(배윤범 오정택)에게 시청공무원 미스 디(황석정 정다희)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황석정이 연기하는 미스 디는 ‘꿈의 집 창조를 통한 사회재생’이라는 슬로건을 반복적으로 설파하는 시청 공무원. 시종일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풍기는 미스 디는 질과 올리 부부에게 ‘공짜 집’ 계약서를 내민다.

연극 ‘빛나는 버러지’에 출연하는 배우들.


“미스 디는 극중에서 다 큰 어른한테도 ‘어린이 여러분’이라 불러요. 가난으로 나약해진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말이죠. 아무리 노력해도 더 올라설 수 없는 계단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구원자가 나타나 손 잡아주길 바라잖아요. 미스 디는 무주택자 부부에게 구원자처럼 접근한 겁니다.”

‘공짜 점심은 없다‘는 자본주의 사회의 오랜 격언처럼 부부가 살게 된 공짜 집에도 대가는 따랐다. 입주 후부터 부부에게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날 집에 노숙자가 침입하게 되고, 놀란 부부는 그를 우발적으로 살해한다. 근데 노숙자들이 하나씩 죽어나갈수록 부부는 집 내부의 인테리어나 주변 환경이 좋아진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살인할수록 풍요해지는 이상한 집에서 부부는 어느 새 공포감과 죄책감을 잊게 된다. 마침내 부부는 효율적 살인까지 계획하게 된다.

“질과 올리도 처음엔 두려웠겠지만 점점 당연한 일이 됩니다. 나중엔 더 좋은 걸 얻기 위해 수많은 희생을 합리화하죠. 작품에선 살인으로 표현되지만 현실은 어떨까요. 우리가 더 좋은 걸 갖기 위해 하는 일들이 다른 사람의 희망을 뺏고 있진 않을까요.”

미스터리한 시청 공무원 미스 디를 연기하는 황석정. 송은석 기자


‘빛나는 버러지’의 미스 디처럼 황석정은 주로 강렬하고 범상치 않은 캐릭터를 연기해왔다. 현란한 말투와 몸짓을 구사하는 짝퉁 핸드백 판매업자(KBS 미니시리즈 ‘비밀’), 후배들에게 엄격하기로 악명 높은 재무부장(tvN 드라마 ‘미생’) 등 그는 연기하는 캐릭터마다 강한 인상을 남겼다.

“데뷔 초엔 평범한 연기는 아예 하지도 못했어요. 사랑을 많이 못 받고 자라 그런지 ‘아름답다’ ‘사랑한다’ 같은 말도 대학 졸업할 때까지 스스로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연기를 하면 그런 말을 잘 구사해야 하잖아요. 그게 너무 괴로운 거예요. 그래서 감정 연기를 주로 해야 하는 사람보다는 신이나 동물 같은 특이한 역을 주로 맡았죠.”

표현할 줄 몰랐던 그는 연기를 하면서 비로소 표현이 주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연기 경력이 쌓일수록 처음엔 그토록 어려웠던 평펌한 인물 연기도 몸에밴듯 편해졌다.

“꾸준히 연기를 해왔던 것이 그나마 저를 인간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어요. 제겐 연기가 타인과 교감할 수 있는 통로가 됐죠.”

드라마, 영화 등 주로 매체 연기자로 활동하는 그는 원래 대학로에서 시작한 무대 배우다. 하지만 개성이 강한 외모와 직설적인 말투와 성격… 대학로 연극판에서 그에게 주어지는 배역은 많지 않았다고 한다.

“예전 여배우들 맡는 역은 주로 사랑스럽고 청초했잖아요. 전 ‘너같이 생긴 X이 어떻게 무대에 올라가냐’는 소리도 들었어요.(웃음) 제게 주어지는 배역이 많지 않았어요. 주로 남자 역을 많이 맡아서 그런지 남자배우인줄 아는 사람도 많았죠. 그땐 연극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어요.”

최근 그는 대학로로 돌아와 다시 무대 맛을 느끼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엔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 연극 ‘일리아드’ ‘천변카바레’ 등 1인극만 3편을 연달아 올렸다.

“예전엔 무대 서는 게 부담스럽고 스트레스 받고 신경 쓰이고 그랬는데 지금은? 너무 자유롭고 즐거워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이제 제겐 무대가 놀이터입니다.”

내년 1월 8일까지, 전석 5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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