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아내가 베란다에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물 박제 연구사인 박인수는 아내가 목숨을 끊기 이틀 전 한 과학관에서 의뢰받은 물개 박제품을 보수하느라 밤을 새웠다. 평소와 달리 연락 없이 이른 새벽 집에 도착했다가 우연히 아내가 화장실에 올려둔 양성 반응의 임신 테스트기를 보게 된다. 비극이 시작된 발단이다. 연년생 남매를 낳은 뒤 정관수술을 한 인수는 아내에게 어찌된 영문인지 묻고 또 물었지만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사흘 뒤 예정된 작업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인수가 집을 나선 사이 아내는 삶을 내려놓았다.
아내가 죽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저자는 인수에게 남은 이 의문점을 특유의 서정적 문체로 풀어나간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 이후 약 30년 만에 출간한 추리소설이다. 장롱 서랍에서 나온 아내의 통장. 그리고 아내의 통장에 입금된 출처를 알 수 없는 1000만 원. 아내의 휴대전화에 수신된 전화·문자의 발신자 2명. 이 몇 가지 단서로 인수는 아내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을 하나씩 파헤친다.
인수가 의뢰받은 사파리 경주마를 박제하는 작업과 아내의 죽음을 둘러싼 추리 과정이 교차된다. 박제가 죽은 짐승에게 새 영혼을 불어넣는 일이라면, 죽음에 대한 진상을 밝히는 과정은 오해로 얼룩진 아내의 삶을 복원해 나가는 여정이다.
경운기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새로 출가한 어머니 대신 동생들을 돌보느라 평생을 희생하며 수동적으로 살아온 아내. 그런 아내와 공통점이 하나도 없는 경주마의 주인 정은영을 볼 때마다 인수는 아내의 죽음을 더욱 곱씹는다. 아내에게 상처받지 않았냐는 은영의 질문에 “제일 안타까운 건 아내가 하루라도 행복했던 적이 있는지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알지도 못해서 이게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고 아픈 것”이라는 인수의 대답은 사랑한 사람을 잃어본 은영과 독자에게 위로를 건넨다.
하지만 아내에게도 행복한 시간이 있었다는 걸 인수는 결국 깨닫는다. 고향에서 동생들과 함께 보낸 배고프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이다. 인수는 아내를 떠올리며 읊조린다. “함께 흔들리며 핀 꽃들로 거친 들판이 아름답고 그걸 견뎌낸 시간이 아름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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