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세월 버틴 힘 전하고파”… 유물이 건네는 특별한 위로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16일 11시 3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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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가야 토기 ‘사슴 장식 구멍단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5세기 가야 토기 ‘사슴 장식 구멍단지’.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사슴 두 마리가 굴곡진 토기 위에 위태롭게 서 있어요.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꼭 제 모습 같았죠.”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1층 가야실. 경희대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인 권명규 씨(24)는 올 2월 박물관을 찾았다가 이곳에서 5세기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가야 토기 ‘사슴 장식 구멍단지’를 만났다. 그는 “고리타분하고 낡은 줄만 알았던 박물관 속 유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곳에서 내 모습이 보였다”며 “먼지 쌓이고 구멍 나고 산산조각 난 유물들은 마음을 다친 이들을 치유하는 힘을 지녔다”고 말했다.

“유물들에게서 얻은 힘을 내 또래 친구들에게도 전하고 싶었어요.”

‘마음복원소’ 프로젝트에 참여한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권명규 씨가 1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달항아리 백자를 바라보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마음복원소’ 프로젝트에 참여한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권명규 씨가 1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달항아리 백자를 바라보고 있다.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권 씨가 대학생 카피라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광고회사 ‘TBWA’ 소속 대학생들이 올 2월부터 국립중앙박물관과 협업해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마음을 치유하는 유물을 추천하는 ‘마음복원소’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이유다.

국립중앙박물관은 8개월 동안의 협업 끝에 지난달 27일 박물관 홈페이지에 ‘마음복원소’를 열었다. 온라인 홈페이지에서 현재 심리 상태를 확인하는 간단한 설문을 진행하면 마음을 보듬어줄 유물들로 코스를 추천해주는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 진로 문제로 고민하는 이에게는 ‘대동여지도’를 추천하며 “헛된 여정은 없다. 결국 모든 길은 이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인간관계로 힘들어하는 이에게 ‘빗살무늬토기’를 추천하며 “먼지 묻고 때 묻은 흔적 덕분에 토기만의 무늬가 오히려 선명해 보이지 않느냐”고 묻는 식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따르면 16일 기준 ‘마음복원소’ 페이지 총 방문자 수는 1만3000여 명에 이른다.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실에서 함께 한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송화연 씨와 성신여대 산업디자인과 서예희 씨, 경희대 국어국문과 권명규 씨(왼쪽부터).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국립중앙박물관 청자실에서 함께 한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송화연 씨와 성신여대 산업디자인과 서예희 씨, 경희대 국어국문과 권명규 씨(왼쪽부터). 안철민 기자 acm08@donga.com

14일 오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권 씨와 함께 이 프로젝트를 이끈 성신여대 산업디자인과 서예희 씨(22)와 부산대 국어국문학과 송화연 씨(24)를 만났다. 이들은 “취업과 진로 문제로 내가 가는 이 길이 맞는 길인지 고민하는 또래 친구들에게 오랜 세월을 버텨온 유물의 힘을 전해주고 싶다”며 웃었다.

프로젝트 기획 초기부터 팀장을 맡은 송 씨는 “어른들이 보기엔 사랑, 돈, 인간관계와 같은 문제는 별 일 아닐 수 있지만 우린 아직 이런 난관이 처음이라 어려울 수밖에 없다”며 “혹시 누군가가 심리 상태를 체크하러 홈페이지에 들어왔다가 내 고민이 없어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다양한 고민 선택지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실제 심리 확인 페이지에는 학업, 진로, 직장생활, 취업뿐 아니라 인간관계, 건강, 돈, 사랑 등 9가지 선택지가 마련됐다.

사이트를 디자인한 서 씨는 “마음을 다친 친구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주는 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유물 추천 코스가 나오는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방문 예약’ 버튼을 추가했다. 마치 박물관과 설문 응답자가 서로 약속을 잡듯 달력에 날짜를 선택하는 식이다. 그는 “마음을 닫고 방 안에 움츠러들었을 친구들을 박물관으로 이끌어내는 게 ‘마음복원소’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마음복원소’ 화면 캡처
‘마음복원소’ 화면 캡처

이들은 또래에게 어떤 유물을 추천하고 싶을까. ‘마음복원소’ 유물 추천 시스템에 적용된 따뜻한 위로 문구 300여 개를 손수 작성한 권 씨는 요즘 또래에게 가장 추천하고 싶은 유물로 조선시대 ‘측우기’를 꼽았다.

“입사시험 면접에서 떨어지다 보면 내가 쓸모 없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해가 쨍쨍한 날의 측우기처럼…. 그럴 때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아직 비가 오지 않았다면 나의 때가 오지 않은 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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