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엔 뚜렷한 서사가 없다. 영화 속 세상은 멈춰있는 듯하다. 일상이 그저 무심하고 느리게 흘러갈 뿐. 청춘의 남녀 주인공이 등장하지만 별다른 로맨스도 없다. 인간적인 호감을 갖게 되는 모습만 어렴풋이 그려진다. 그런데 104분 동안 가만히 보게 된다. 무심함과 무자극 느림은 이 영화를 계속 보게 만드는 힘이다. 24일 개봉하는 ‘창밖은 겨울’ 이야기다.
영화의 무대는 경남 창원시 진해구. 옛 진해시 일대다. 진해는 벚꽃으로 유명한 봄의 도시지만, 영화엔 익숙한 진해의 봄 대신 다소 낯선 늦가을과 초겨울이 담겼다.
영화는 서울에서 영화감독을 하다가 고향 진해로 와 시내버스 기사로 일하는 석우(곽민규)와 버스터미널 매표소 직원이자 유실물 보관소 업무를 하는 영애(한선화)의 일상을 따라간다. 석우는 터미널 대기실에서 발견한 고장 난 MP3를 유실물 보관소에 가져다준다. 석우는 영애에게 MP3 주인이 왔느냐고 틈만 나면 묻는다. 거의 쓰는 사람이 없는 MP3에 집착하는 그가 영애는 조금 신기하다. 영애는 MP3는 누군가 잃어버린 게 아니라 버린 거라고 말한다. 유실물 보관소 가득한 물건들도 대부분 찾아가지 않는 만큼 버린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 석우는 “잃어버린 것”이라며 찾아올 사람이 있을 것이란 미련을 품는다. 두 사람은 문제의 MP3를 고칠 수리점을 찾아 진해 골목을 곳곳을 다닌다.
영화 속 시간이 멈춘 듯한 진해 곳곳의 풍경은 이 별것 없는 이야기를 계속 지켜보게 만든다. 도시인 듯 시골인 듯한 소도시 특유의 모습과 버스 터미널, 골목골목 들어선 작은 집, ‘이용원’ ‘인판사(인쇄소)’ 등 과거에 머물러있는 공간까지 모든 것이 오래된 이 한적한 소도시는 그 모습 자체로 잔잔한 매력을 빚어낸다. 두 사람이 오래된 공간에서 천천히 걷는 모습만 봐도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다.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이상진 감독은 “진해가 고향이다. 20년 가까이 살았던 만큼 자연스럽게 영화 무대가 되는 것 같다”며 “진해가 완전 시골도 아니고 도시도 아니어서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런 부분들에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주요 소품인 유실물 보관소에 놓인 MP3는 잃어버린 것인지 버린 것인지 모를 청춘의 꿈같다. 31세 석우는 영화감독의 꿈을 버린 것일까. 잠시 잃어버린 것일까. 배우 곽민규는 늘 생각에 잠겨있고 좀처럼 표현을 하지 않는 석우 캐릭터를 통해 경계에 선 청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담아냈다. 강하고 톡 쏘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온 배우 한선화는 이번엔 가장 평범한 모습을 그려내느라 공을 들였다. 진해 현지의 노인 등 평범한 사람들을 보조출연자로 캐스팅하는 등 진해의 모습을 사람들까지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 한 감독의 연출 솜씨가 돋보인다.
북적이고 시끄러운 대도시를 벗어나 여전히 아날로그 세상에 머물러있는 소도시를 잠시나마 조용히 여행하는 느낌을 주는 건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다. “아 이제 진짜 겨울이네요” “그러네요. 제법 추워졌어요” 등 평범하기만 한 무자극 대사가 가진 매력을 담아낸 작품으로 겨울 초입 혼자 보기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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